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173> 문자와 악보; 기록의 산물

bindol 2021. 4. 17. 04:29

 

문자와 악보는 기록이란 공통점이 있다.

인류는 언어와 음악 중 무엇을 먼저 시작하였을까? 음악이 언어보다 더 앞서 생기지 않았을까? 언어가 사고의 산물이라면 음악은 사고에 앞선 감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원시인들은 단순한 박자와 선율로 그들의 원시적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을 것 같다. 음악의 시작은 언어의 시작보다 앞섰지만 음의 기록인 악보는 말의 기록인 문자보다 수천 년 늦어졌다. 문자는 6000여 년 전부터, 악보는 200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고대에는 문자로 음을 기록했다(文字譜). 중세에는 음의 높낮이를 간단하게 기록한 네우마(neuma) 악보가 있었다. 12세기에 음 길이의 장단까지도 기록할 수 있는 유량악보(有量樂譜)가 나왔고, 17세기에 지금과 같은 다섯줄 악보(五線譜)로 정립되며 널리 퍼졌다. 국악에도 세종 때 만들어진 정간보(井間譜)가 있다. 우물(井)이 위아래로 연결된 모양 안에 음의 높낮이와 길이도 기록했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지만 한눈에 쉽게 들어오는 오선보보다 어려운 건 사실이다.

콩나물 대가리로 가득한 지겨운 악보를 가만히 보면 기보법 체계가 매우 시각적이다. 음의 높낮이, 길이의 흐름은 물론 화음, 쉼의 전개까지 확연하게 들어온다. 이보다 더 효과적 기보법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악보를 읽어 노래부를 수 있고, 듣거나 떠오르는 음을 악보로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정도로 악보를 익히는 일은 외국어 하나 익히는 것만큼 어렵다. 아무나 못하는 일이라 더욱 부럽다. 대신에 이렇게 문자와 그림으로 생각을 기록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