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137> 18번과 애창곡;정말로 애창하려면

bindol 2021. 4. 18. 04:33

18번은 우리에게 아픈 역사가 있는 씁쓸한 단어다. 애창곡으로 달래자.

음악가가 연주하는 목록을 레퍼토리(repertory)라고 한다. 17세기 무렵 일본의 대중연극인 가부키(歌舞伎)에서 어느 배우가 장이 바뀌는 막간에 18개의 공연을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는데 그 18개의 공연목록이 그 배우의 레퍼토리다.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을 마지막인 18번째에 했을 것이다. 여기서 18번(十八番)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니 아마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쓰던 말을 장기(長技)의 뜻으로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반인들이 18개나 되는 레퍼토리를 가지기는 힘들다. 그래도 노래든 춤이든 개그건 성대모사든 서너 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으면 좋다. 그런데 노래에서 우리는 18번으로 부를 수 있는 애창곡을 잊어버린 듯하다.

1990년대 초반 일본에서 온 가라오케(からオケ)는 부산을 거쳐 노래방으로 거세게 확산됐다. 우리 유흥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노래방 덕분에 노래 부를 기회는 많아졌지만 노래방 때문에 애창하는 기회는 사라졌다. 노래방의 역설(paradox)이다. 정말로 18번다운 애창곡이라면 노래의 선율과 리듬은 물론 가사가 체득돼야 한다. 그런데 노래방 화면의 가사를 보고 부르려니 노래의 필링이 안 살며 그루브가 안 나온다. 화면 가사가 없으면 노래를 한 줄도 못 부르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왕에 부를 거라면 정말로 애창곡답게 부르자. 가사 나오는 비디오 안 보고 당당히 앞을 보며 부르자. 서너 평 작은 노래방에서 마이크 없이 부르면 육성의 생생함이 산다. 노 비디오, 노 마이크! 필자는 그리 한다. 누구든 하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노래방 습관이 겨우 20여년 만에 굳게 배어 힘들어져 버렸다.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