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125> 최참판댁과 최씨고택; 무엇이 진짜일까?

bindol 2021. 4. 18. 04:42

두 최씨 집을 비교하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선명하게 보인다.

현지에서 듣기로는 고 박경리 작가가 하동에서 어느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단다. 그녀가 만석꾼 부잣집에 구걸을 했는데 문전박대를 당하자 그 부자의 대가 끊길 것이라는 저주를 내리며 젖먹이 아이와 같이 굶어 죽었단다. 이 슬픈 전설을 모티브로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를 완성하였단다. 소설은 TV 드라마로 세 번이나 만들어졌다. 하동군은 그 인기를 살려 주인공 최서희 집으로 2002년에 최참판댁을 완공했고 유명관광지가 되었다. 지역 스토리텔링의 성공사례다. 하지만 최참판이라는 부자는 전설 속 가상(假想) 인물이다. 서희도 소설 속 가공(架空) 인물이다. 최참판댁도 허구의 세트장이다.

이와 달리 경주 교촌의 최씨부자와 최씨고택은 진짜다. 18세기에 지어진 최씨고택은 최부자가 살던 집이다. 최부자 가문의 여섯 행동지침(六訓) 중에 다섯 번째는 집 주변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이다. 여섯 정신자세(六然) 중 두 번째는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라이다. 경주 최부자 12대 최준은 일제강점기에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가 일본인에게 들켜 심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증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흥미만 있는 픽션이 아닌 흥미와 의미가 같이 있는 논픽션 대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최참판댁에서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는 현상이 목격된다. 최씨고택은 최참판댁과 감히 비교대상도 안 된다. 보들리야르가 통찰했듯이 현대인은 실제의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진짜같은 시뮬라크르의 황홀경에 빠져 사는 건 아닐까?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