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5> 트집을 잡다? : 시비를 걸다?

bindol 2021. 4. 20. 05:03

두 낱말 모두 싸움을 거는 것처럼 여겨지나 그런 뜻과 거리가 멀다.

트집의 사전 정의는 조그만 흠을 들추어내어 불평하거나 비난하여 남을 괴롭히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 부리는 성질인 몽니와 일이 잘 안 되도록 몹시 방해하는 까탈이 있다. 트집을 부리다, 몽니를 부리다, 까탈을 부리다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트집이란 원래 그런 뜻이 아니다. 옻나무에서 옻액을, 소나무에서 송진을, 고로쇠나무에서 고로쇠액을 얻기 위해 나무에 흠집을 낸 것이다. 트집은 내는 것이지 트집을 잡을 수는 없다. 트집은 몽니나 까탈처럼 부리는 것이 아니다. 고로쇠물을 얻겠다고 나무에 트집을 내 깔대기를 꼽은 모양은 곰쓸개즙(熊膽)을 얻겠다고 살아있는 곰의 배에 대롱을 꼽은 것처럼 비추어진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무리 말못하는 식물이라도 아파할 것같다. TV에서 어떤 사람은 고로쇠물을 많이 먹으려고 짠 젓갈을 먹어가며 목을 마르게 해 고로쇠물을 마신다고 한다. 탐욕적이고 어리석기도 하다.

시비란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줄임말이다. 옳은 것이(是) 옳은지(是), 아닌 것은(非) 아닌지(非) 정확히 밝히자는 뜻이다. 그러니 시비(right or wrong)는 상대방한테 싸우자며 거는 것이 아니라 가리는 것이다.

나무도 그렇지만 사람도 트집이 나면 아프다. 사람 마음에도 트집을 내면 증오의 체액이 흘러나와 분이 일고 화가 난다. 시비를 걸어 싸우려는 것은 나쁘지만 시비를 잘 가리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이다. 트집을 내서 시비를 걸면 서로 좋을 게 없다. 시비를 가리되 싸움하듯 따지지 말고 유연하게 서로 입장을 바꿔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 시끄럽게 싸울 일이 조용히 사라진다.

박기철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