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힐, 밝을 명(日-4) 덕 덕(彳-12)
明明德(명명덕)은 "밝은 덕을 밝히다"는 뜻이다. 왜 그냥 '덕'이 아니라 '밝은 덕'인가? 이는 강조한 것이다. 강조한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懇切(간절)하고 切實(절실)하다는 뜻이다. 왜 간절하고 절실한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데 긴요한 것, 집안을 가지런히 하거나 나라를 다스리거나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냥 덕이라고 할 것이지, 왜 구태여 밝은 덕이라 했는가? 이는 '大學(대학)'이 쓰였던 그 시대적 상황에 말미암은 것이다.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혼란과 전쟁이 거듭되어 제후나 귀족, 백성 모두 위태롭고 괴로웠던 시절, 사람의 본성에 대한 믿음이 가장 약화되어 好利之性(호리지성) 즉 "이익을 좋아하는 본성"을 지녔다는 法家(법가) 사상가들의 주장이 참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시대에 저술된 글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오랫동안 유가 정치학의 교과서로 간주되어 신봉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사상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과 상관없이 저술된 것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어떠한 사상이나 철학도 진공 상태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체로 독창적인 사유나 뛰어난 식견은 혼란이 극심하고 지독히 혼탁한 시대의 산물이다.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에 누가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사유를 펼치려 하겠는가. 그럼에도 德(덕)이라는 글자의 본뜻부터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할 필요는 있다.
德은 金文(금문)을 보면 본디 "조금 걷다, 길을 가다"는 뜻의 彳(척)과 "살피다, 깨닫다"는 省(성)이 합쳐 이루어진 글자다. 나중에 "마음"을 뜻하는 心(심)이 덧붙었다. 이로써 보면, 덕은 차근차근 자신을 살피면서 내적인 자각을 이루어 얻은 마음, 나아가 이치를 체득한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덕을 지닐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맹자는 良知(양지)요 良能(양능)이라 했다.
사람이 짐승과 달리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무리 법가 사상가들이 "사람의 본성은 나쁘다"고 말하더라도, 이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법가 사상가 자신들이 가졌던 능력도 이 덕이 아닌가? 문제는 이 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할 때 사람은 사람답다고 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는 데 있다. 어떤 짐승보다 끔찍한 폭력을 저지르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던가? 덕은 바로 폭력과 대립된다. 그 폭력이 武力(무력)이든 刑罰(형벌)이든 남을 억압하거나 강제하는 힘이라면 모두 덕과 어긋난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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