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지(糸 -4)위 상(一 -2)군사 병(八-5)법 법(水-5)
紙上兵法(지상병법) 수준임에도 스스로 병법의 고수라고 자처했다가 처참하게 패배를 겪은 대표적인 인물이 전국시대의 趙括(조괄)과 삼국시대의 馬謖(마속)이다.
기원전 260년, 秦(진)나라가 趙(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는 廉頗(염파)를 보내 대적하게 했다. 두 나라 군사들은 長平(장평)에서 대치했다. 염파가 비록 명장이었으나, 조나라 군사는 진나라 군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두어 차례 전투를 치른 뒤 염파는 가장 좋은 책략이 持久戰(지구전)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수비를 공고히 하여 적군의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될 때를 기다렸다가 기습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조나라 군주 孝成王(효성왕)은 염파의 책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나라도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자, 재상 范雎(범저)가 '反間計(반간계)'를 썼다. 첩자들에게 거금을 주어 조나라에 보낸 뒤 "염파가 공격하지 않는 것은 몰래 진나라와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조괄이 장군이 되는 것이다" 따위 流言蜚語(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이에 효성왕은 그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고 염파 대신에 조괄을 보내 장평 전투를 총괄하게 했다.
조괄은 병법서를 읽어 지식은 많았으나, 실전 경험이 없었다. 군중에 도착하자마자 호령을 모조리 바꾸고 군관들까지 모두 교체하고는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마침내 조나라 군사가 공격하자 진나라 장수 白起(백기)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은 채 도주했고, 조괄은 기세를 올리며 뒤쫓았다. 결국 백기의 誘引策(유인책)에 걸려들어 포위당한 조괄은 포위망을 뚫으려 애쓰다가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지휘관을 잃은 조나라 군사는 모두 전의를 잃고 투항했다. 백기는 40만에 이르는 포로를 모두 구덩이에 매장시켜서 죽였다. 지휘관의 傲慢(오만)과 誤判(오판)이 부른 후과는 참으로 처참했다.
삼국시대 蜀(촉)의 마속은 걸출한 재능을 가졌고 군사 전략에 관해 논의하기를 좋아했는데, 승상 諸葛亮(제갈량)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228년, 제갈량은 과감하게 魏(위)나라 공략에 나섰다. 그때 경험이 풍부한 魏延(위연), 吳壹(오일) 등의 장수가 있었음에도 제갈량은 마속을 선봉에 세워 위나라 장수 張郃(장합)과 가정(街亭)에서 싸우게 했다.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병법서에 나온 대로 산 위에 진을 쳤다가 장합에게 격파되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촉의 군대는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군법에 따라 마속의 목을 베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성어가 나온 배경이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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