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오(火-6)모일 합(口 -3)갈 지(丿-2)군사 졸(十-6)
병법서만 보고서 병법을 안다고 여긴 조괄이나 마속과 달리, 병법의 원칙을 자유자재로 운용하여 명성을 떨친 인물이 있다. 바로 劉邦(유방)을 도와 漢(한)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한 韓信(한신)이다. '史記(사기)' '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에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회음후는 한신이 받은 작위다.)
한신이 趙(조)나라를 치려 했을 때다. 그가 거느린 병사는 수만 명이었으나, 정예병이 아니라 거의 烏合之卒(오합지졸)이었다. 게다가 수레 두 대가 나란히 갈 수 없는 매우 좁은 井陘(정형)을 거쳐서 가야만 했다. 조나라 왕과 成安君(성안군)은 이 소식을 듣고 정형 어귀에 병사를 모았는데, 무려 20만 명이었다. 이때 李左車(이좌거)가 성안군에게 병사 3만 명을 빌려주면 지름길로 가서 적의 군량미 수송대를 쳐서 본대와 끊어놓겠다는 계책을 내놓았다. 이 계책대로 한다면, 굳이 맞아 싸우지 않아도 먼 곳에서 온 한신의 군대는 식량 부족으로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성안군은 儒者(유자)로서 언제나 의로운 군대 운운하면서 속임수나 기이한 계책을 쓰지 않는다고 자부한 인물이었다. 이번에도 '손자병법' '謀攻(모공)'편에 나오는 "十則圍之, 五則攻之, 倍則分之"(십즉위지, 오즉공지, 배즉분지) 즉 "아군의 병력이 열 배가 되면 적을 포위하고, 다섯 배가 되면 공격하고, 두 배가 되면 병력을 나누어 상대한다"는 용병술을 내세우며 이좌거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正道(정도)만 알고 있었던 셈이다.
사실, 병법에 뛰어난 한신이었으므로 오합지졸을 이끌고 폭이 좁은 길을 통해 적을 치러가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략가가 적진에 존재한다면, 아군은 孤立無援(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大敗(대패)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내심 불안해하면서 미리 첩자를 풀어 조나라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좌거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이다. 이를 안 한신은 매우 기뻤다.
한신은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과감하게 정형의 좁은 길을 내려와 정형 어귀에서 삼십 리 못 미친 곳에 머물러 야영했다. 그날 밤, 군령을 정하여 날랜 병사 2000명을 뽑아 저마다 붉은 기를 하나씩 가지고 샛길로 해서 산속에 숨어 조나라 군사를 바라보게 시키고는 이렇게 명령하였다.
"조나라 군사는 우리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성을 비워 놓고 우리 군사의 뒤를 쫓아올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재빨리 조나라 성으로 들어가 조나라 기를 빼고 한나라의 붉은 기를 세워라!"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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