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68> 躬自厚

bindol 2021. 6. 2. 06:19

몸 궁(身-3)스스로 자(自-0)두터이 할 후(-7)

 

"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기소후자박이기소박자후, 미지유야) 곧 "두터워야 할 데를 얄팍하게 하고, 얄팍하게 할 데를 두텁게 하는 일은 아직 없었다"고 했는데, 무엇이 두터워야 할 데고 무엇이 얄팍하게 할 데인가? 주희는 "所厚, 謂家也"(소후, 위가야) 곧 "두터워야 할 데는 집안을 이른다"고 해석했다. 몸을 닦는 수신을 뿌리로 삼는다는 구절이 앞서 나오므로 이렇게 해석한 듯하다. 과연 그럴까?

'집안'이 두텁게 해야 할 대상이라면, '몸'은 얄팍하게 해도 되는가? 또 나라나 천하는 어떤 대상인가? 두텁게 대해야 할 대상인가, 얄팍하게 대해야 할 대상인가? 의문이 거듭된다. 이는 두텁게 하거나 얄팍하게 하거나 할 대상이 고정된 것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2-3(지난 21일 자 27면)에서는 '집안'으로 볼 여지가 없지 않으나, 꼭 그렇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가 분명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어지는 "이것이 뿌리를 안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이 앎이 지극하다고 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감안한다면, 주희의 해석에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주희가 새롭게 편집한 '대학장구'에서는 이 구절이 아예 빠져 있다. 아무튼 주희의 해석은 정치나 통치보다는 수신의 윤리학에 치우쳐 있는 셈이다.

거듭 말했듯이 '대학'은 정치학 또는 통치술을 다루고 있다. 군주가 통치를 하고 관리들이 정치를 하려고 한다면 먼저 뿌리가 되고 바탕이 되는 수신부터 하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결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두터워야 할 것과 얄팍하게 해도 될 것은 무엇을 이르는가? 이는 주체에 따라, 대상에 따라, 상황이나 추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서 딱히 特定(특정)할 수 없다.

가령 '논어' '衛靈公(위령공)'에서 공자는 "躬自厚, 而薄責於人, 則遠怨矣"(궁자후, 이박책어인, 즉원원의)라고 말했다. "제 몸을 스스로 두터이 하고 남을 엷게 꾸짖는다면, 남들의 응등그러진 마음이 멀어진다"는 뜻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놓치는 것, 배움의 길에 있는 사람이나 덕을 쌓으려는 사람이 반드시 새겨두어야 하는 것을 일깨워준 말이다.

덕을 쌓으려면 자신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 남의 눈에 든 티끌은 잘 보면서 제 눈에 든 들보는 좀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고 엄격하게 다잡는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고 두터이 하라고 한 것이다. 반면에 남의 허물은 너그럽게 보아주고 꾸짖을 일은 엷게 해도 된다. 이것이 공자가 말한 두터이 할 일과 얇게 할 일이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