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76> 自謙

bindol 2021. 6. 2. 07:49

스스로 자(自-0)몸 낮출 겸(言-10)

 

자신의 간사함과 음흉함, 거짓과 위선을 들키지 않았다고 잘 속인 게 아니다. 남을 속이기 전에 이미 제 자신을 속였다. 자신을 잘 속여야 남을 잘 속이는 법이다. 그래서 자신은 바르고 곧으며 착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더라도 그가 가까이하는 사람은 결국 소인이다. 설령 잘 속여서 군자를 가까이하더라도 그 군자가 곧 그를 멀리할 것이니, 어찌 가까이하는 자들 가운데 군자가 있겠는가?

"일어나는 사물들에는 반드시 처음이 있다. 찾아온 영예나 치욕은 반드시 그 덕의 드러남이다. 고기가 썩으면 벌레가 생기고, 물고기가 마르면 좀이 생긴다. 게으르고 건방져서 제 몸을 잊으면, 재앙과 불행이 닥친다. 굳세면 스스로 버팀목이 되지만, 무르면 저절로 매이게 된다. 삿됨과 더러움이 몸에 있으면 응등그러진 마음이 맺힌다. 땔나무를 일자로 고르게 벌여놓으면 불은 마른 데로 나아가고, 땅을 일자로 고르게 하면 물은 축축한 데로 나아간다. 풀과 나무는 무리를 지어 생겨나고, 날짐승과 길짐승은 떼를 지어 사는데, 사물은 각각 저와 같은 것들을 따른다. 이런 까닭에 과녁을 펼치면 활의 화살이 이르고, 나무숲이 우거지면 큰 도끼들과 작은 도끼들이 이르며, 나무가 그늘을 이루면 뭇 새가 쉬고, 쉰내가 나면 파리 떼가 몰려든다. 그래서 말에는 불행을 부르는 것이 있고, 행동에는 치욕을 부르는 것이 있으니, 군자란 어디에 있든지 삼가야 하리라!"

'순자' '勸學(권학)'에 나오는 이 구절은 사물을 거론하면서 시작되어 삼갈 愼(신)에서 마무리되고 있는데, 이는 '대학'에서 격물과 치지를 말하고 이어 誠意(성의)를 말한 취지와 다르지 않다. 언제 어디서나 삼가야 하는 이유는 자신도 모르게 불러올 지도 모를 치욕을 멀리하고 불행을 미리 막는 방도가 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는 것이 많음에도 삼갈 줄 모르면 "불행을 부르는 말과 치욕을 부르는 행동"을 할 공산이 크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3-1(지난달 31일 자 제74회)에서는 성의와 신독을 말하면서 "스스로 낮춘다"는 '自謙(자겸)'을 거론했는가? 뜻을 성스럽게 지닌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모자람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미 성스럽다면 굳이 뜻을 성스럽게 지니려 애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앞서 '중용'에서 말했듯이 성스러워지려는 것이 사람의 길, 군자의 길이다. 오롯이 이 길을 가면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스스로 모자란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 일이다. 이렇게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을 마치 악취를 싫어하고 예쁜 얼굴을 좋아하듯이 하라고 했다. 이것이 곧 스스로 낮추는 일이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