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77> 吾斯之未能信

bindol 2021. 6. 2. 10:36

나 오(口-4)이것 사(斤-8)갈 지(丿-3)아직 아닐 미(木-1)잘할 능(肉-6)믿을 신(人-7)

 

'논어' '公冶長(공야장)'편에 나온다. 공자가 제자인 漆雕開(칠조개)에게 벼슬살이를 하라고 하자, 칠조개가 이렇게 대답했다.

"吾斯之未能信."(오사지미능신)

"저는 아직 그걸 잘할 자신이 없습니다"라는 뜻이다. 이에 공자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의 학문은 수신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수신에서 머무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세상에 쓰일 학문을 하여 세상에 쓸모가 있는 인재가 되는 것이 공부의 길이었고, 그 공부로써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 정치의 길이었다. 공자가 평생 정치가의 길을 모색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공부가 무르익기도 전에 세상에 나서는 것은 참 곤란하다. 아니, 위태롭다. 특히 시절이 하수상한 난세에는 더욱 그렇다. 자칫 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困厄(곤액)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어' '先進(선진)'편을 보면, 자로가 사제인 子羔(자고)를 費(비) 땅의 수령으로 천거했을 때, 공자가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공부가 아직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그 자신을 실로 위태롭게 만드는 짓이라는 말이다. 공적인 일을 망치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물며 군주가 되어 통치술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 또 덕성 또한 갖추지 못했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까?

기원전 284년, 燕(연)나라가 齊(제)나라를 공격해서 순식간에 제나라 도성 臨淄(임치)와 70여 성을 함락시켰다. 제나라 閔王(민왕, 또는 湣王)은 莒(거) 땅으로 달아났으나, 구원하러 온 초나라의 장수 淖齒(요치)가 민왕을 죽여버렸다. 이때 제나라의 田氏(전씨) 일족 가운데 한 사람인 田單(전단)은 도성에서 시장을 감독하는 관리로 있다가 집안사람들을 데리고 탈출하여 卽墨(즉묵)으로 달아났다. 전단은 즉묵에서 패잔병들을 이끌고 연나라 군대와 싸웠다. 마침내 기묘한 책략을 써서 연나라 장수 騎劫(기겁)을 죽이고 연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그 승세를 타서 차츰차츰 70여 개 성을 모두 되찾았다.

처음에 요치가 민왕을 죽이자 거 땅 사람들은 신분을 감추고 민간에 숨어 있던 태자 法章(법장)을 찾아내서 거 땅으로 맞아들였다. 전단이 제나라 땅을 회복하자 제나라 사람들은 전단이 자립해서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전단은 태자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했다. 그가 襄王(양왕)이다. 양왕은 전단을 상국으로 삼았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