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맹(子-5)임 자(子-0)마디 절(竹-9)글 문(文-0)
주원장의 열등감은 의심증을 낳고 잔인함을 불렀다. 신하들이 옥좌를 넘볼까 걱정하여 잔인하게 공신들도 대거 죽였다. 승상 胡惟庸(호유용)의 세력이 커지자 그가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관련된 사람들까지 무려 3만여 명을 죽였다.
또 몽골에 원정하여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藍玉(남옥)을 모반 혐의로 몰아서 그와 관련된 사람들 모두 1만 5000여 명을 죽였다. 이런 식으로 주원장은 공신들을 죽여 없앴으니, 이는 정권 유지와는 상관없이 열등감에서 비롯된 잔혹한 짓이다.
이런 주원장의 잔혹함을 보다 못한 태자 朱標(주표)가 "폐하, 천하가 살육으로 넘치니 화가 미칠까 걱정입니다"라고 간언하자,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던 주원장은 다음 날 아들을 불러서 가시가 박힌 몽둥이를 땅에 던지고는 집어 들게 했다. 태자가 머뭇거리자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들지 못하니, 내가 잘 다듬고 갈아서 너에게 주마. 지금 내가 죽인 자들은 모두 천하에 난을 일으킬 자들로 손을 찌르는 가시와 같은 자들이다! 너를 위해 이것들을 없애주는데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느냐?"
한낱 거지나 땡추에 지나지 않던 자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잔혹한 짓을 저지른 게 아니다. 배워서 자신을 갈고닦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열등감을 갖게 만들어 대신이든 공신이든 이른바 지식인이라면 가리지 않고 살육했던 것이다.
아무리 어용 문인들이 주원장을 칭송하는 말을 늘어놓더라도, 또 후덕한 모습의 초상화를 그려서 남기더라도 그가 저지른 잔혹한 짓들은 가려지지도 덮여지지도 않는다.(주원장의 초상화로는 두 가지가 남아 전하는데, 전혀 다른 모습이다.)
주원장은 '맹자' '離婁 下(이루 하)'에 나오는 "군주가 신하를 흙이나 티끌처럼 여기면 신하는 군주를 원수처럼 여긴다"는 뜻의 "君之視臣如土芥, 則臣視君如寇讐"(군지시신여토개, 즉신시군여구수)나 '盡心 下(진심 하)'에 나오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는 뜻의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민위귀, 사직차지, 군위경)이라는 대목을 읽고는 공자묘에서 그의 위패를 철거했을 뿐만 아니라, '맹자'에서 불온하다고 여긴 80여 개의 구절을 대거 삭제하고는 새롭게 '孟子節文(맹자절문)'을 편찬하여 이를 과거시험 교재로 쓰게 했다. 그러나 불과 20여 년 만에 자신의 아들인 永樂帝(영락제, 1402∼1424 재위)에 의해서 본래의 '맹자'가 다시 과거의 교재로 쓰이면서 '맹자절문'은 잊혀졌다. 참 허망하지 않은가?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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