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울 와(巨-2)땔나무 신(艸-13)맛볼 상(口-11)쓸개 담(肉-13)
王政(왕정)에서는 왕이 통치의 중심에 있으므로 대소신료들이나 백성들의 이목은 왕에게 쏠리기 마련이다. 군자나 현자라면 왕의 언행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하여 도리를 따르겠지만, 소인들이나 백성은 왕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취향을 좇아서 행동할 것이다. 앞에서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앞의 글(<118>)에서 말한 초나라 왕은 靈王(영왕)으로, 기원전 535년에 章華宮(장화궁)을 짓고 그곳에 허리가 가는 여자들을 모아 놓았다. 그러자 도성 안의 여자들이 허리를 가늘게 하기 위해서 먹지 않고 굶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궁을 '細腰宮(세요궁)'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영왕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인데, 환공처럼 패자가 되고 싶어서 중원의 제후국들과 거듭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가 군사를 이끌고 정벌에 나섰을 때, 그의 탄압을 받았던 대부와 공자들이 도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급히 군사를 돌렸으나, 새 왕이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났다. 결국 홀로 돌아다니다 굶어 죽기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술을 좋아했다는 오나라 왕은 실제로는 越(월)나라 왕 句踐(구천)이다. 오나라 왕 闔廬(합려)가 군사를 이끌고 월나라를 쳤다. 그러나 군대는 패배하고 자신은 상처를 입었다. 죽을 때 아들인 夫差(부차)를 불러 복수를 당부했다. 부차는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하여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이를 안 구천이 먼저 선수를 쳐서 토벌하려 했다. 그러나 현명한 신하 范蠡(범려)가 아무런 이득이 없다면서 말렸다. 구천은 이미 자신이 결정한 일이라면서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쳤는데, 도리어 부차가 이끄는 군사에게 패배하고 겨우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會稽山(회계산)으로 달아났다.(환공이 관중의 말을 듣지 않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당한 일과 흡사하다.) 회계산에서 포위를 당한 구천은 결국 범려의 계책에 따라 오나라 왕에게 항복하여 간신히 살 수 있었다. 살아 돌아온 뒤에는 치욕을 잊지 않으려고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부차가 부친의 복수를 위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은 잔 일과 함께 묶어서 흔히 '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 한다.
회계산에서 무릎을 꿇은 구천은 곧 오나라 왕의 곁에서 종노릇을 했고, 3년이 지나서야 월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온 구천은 군대와 백성을 훈련시키며 오나라에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검술을 비롯해 갖가지 무예에 뛰어난 인재를 널리 찾아서 쓰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10여 년이 지나 오나라를 칠 때가 되었는데, 구천은 병사들이 아직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고 또 죽을힘을 다해 싸우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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