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84> 趙括

bindol 2021. 6. 5. 05:35

 

 

새 정부가 ‘부자 증세’를 추진하려 하자, 야당에서는 곧바로 우려 또는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야당 쪽의 의중이야 당연히 반대가 목적인 듯하지만, 그들의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증세의 동기나 본질이 무엇이냐를 놓친 듯하다. 증세의 본질은 바로 조세의 형평성과 공정성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조사가 한 말은 깊게 새겨야 한다.

이미 많이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누리려 한다면, 마땅히 자신이 사는 사회와 나라가 튼튼해야 한다.

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지구촌 곳곳에서 거듭 되풀이되는 국지전을 보라. 내란과 전쟁, 소요와 불안이 가득한 나라에서 과연 부자라 해서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을까? 누구도 안정을 누릴 수 없다. 안정을 누리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고작 감옥 같은 삼엄한 울타리 안에서 누릴 뿐이다. 대로를 활보하면서 떳떳하게 거침없이 자신의 재물을 맘껏 쓰던가?

다시 조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조사는 매우 공평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의 창고가 가득 차게 했다. 조사는 또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진나라 군대가 한나라를 치려고 했을 때, 조사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진나라 군대를 크게 깨뜨려서 물리친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왕은 조사를 마복군에 봉했다.

조사에게는 조괄(趙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워 군사에 대해 이 세상에서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고 자부했다.

부친 조사와 함께 군사 문제를 토론한 적이 있는데, 조사가 당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사는 아들이 잘한다고 하지 않았다. 조괄의 모친이 그 까닭을 묻자, 조사가 말했다.

“전쟁이란 목숨을 거는 일이오. 그런데 괄은 전쟁을 너무 쉽게 말하오. 조나라가 괄을 장군으로 삼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만일 괄을 장군으로 삼는다면 틀림없이 조나라 군대는 괴멸될 것이오.”

혜문왕이 죽고 효성왕(孝成王, 기원전 265∼245 재위)이 즉위했다. 효성왕 7년에 진나라가 쳐들어와 長平(장평)에서 조나라 군사와 대치했다. 조사는 이미 죽었고, 인상여는 병이 깊었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