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45> 靖康之禍

bindol 2021. 6. 6. 05:11

- 다스릴 정(靑-5)편안히 할 강(广-8)의 지(丿-3)재난 화(示-9)

 

휘종은 아마도 강남의 경관을 수도 汴京(변경, 지금의 開封)에 그대로 재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名木(명목), 名花(명화), 奇巖(기암), 珍石(진석) 따위를 다 그러모으려 했다. 그래서 蘇州(소주)에 應奉局(응봉국)을 설치하여 주충의 아들 朱勔(주면)에게 그 일을 총괄하게 했다. 주면은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암벽과 늪지대까지 샅샅이 뒤졌다. 士人(사인)들의 집에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라도 볼만한 것이 있다고 하면, 즉시 건장한 사졸들을 거느리고 그 집으로 들어가 노란 보자기를 덮고는 황제의 물건이라 했다. 이를 가져올 때는 그 집을 철거하고 담장을 헐어서 꺼냈다. 또 산을 깎고 돌을 실어 나르는 일을 추진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하고 각박하게 굴었다. 찾아낸 것들을 강남에서 개봉까지 운반하는 데에는 또 얼마나 많은 백성이 동원되었을까.

이렇게 황제의 취향을 만족시키느라 공권력을 마구 휘둘렀으니, 민심이 흉흉해지지 않을 까닭이 없었으리라. 실제로 1120년 10월, 절강의 靑溪(청계)에서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특히 화석강 책임자인 주면을 주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규모가 워낙 커서 동관이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야 겨우 진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얼마나 민심의 이반이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이때 동원된 대군은 본래 북방을 지키기 위한 군대였는데, 난을 진압하려고 남하시킨 것이었다.

휘종 때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여진족은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공격했다. 이윽고 금나라는 요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점령했으며, 1125년에는 개봉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휘종은 책임을 면하려고 제위를 장남 趙桓(조환)에게 물려주고는 남쪽으로 피신했다. 새 황제 欽宗(흠종)은 막대한 양의 금과 은 따위를 바치고 금나라와 화해했다.

그러나 靖康(정강) 원년(1126), 금나라 군대는 다시 대거 공격하여 개봉을 함락시켰다. 개봉은 철저하게 유린되었고,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흠종과 휘종 및 후비, 종실 등 30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갔다. 이를 ‘靖康之禍(정강지화)’라 한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