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63> 君之師友

bindol 2021. 6. 7. 05:36

임금 군(口-4)의 지(丿-3)스승 사(巾-7)벗 우(又-2)

 

“(위충현은) 사당 하나를 지을 때마다 많게는 수십만, 적게는 수만씩 백성의 재물을 뜯어내고 公帑(공탕, 국고)을 침범했으며, 수목을 벤 것이 헤아릴 수 없다. 開封(개봉)의 사당을 짓기 위해 민간 가옥 2000여 칸을 허물고 궁전 아홉 동을 짓기 시작했다. 거동은 제왕과도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들은 위충현 앞에서 “九千歲(구천세)!”를 외쳤다고 한다. 황제에게는 “萬歲(만세)!”라 하니, 천세를 줄인 것이다. 한낱 환관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환관이 권력을 독점했으니, 어찌 조정에 인재가 있을 것이며 올바른 정치가 이뤄질 것인가? 황제가 황실을 보존하려 한들, 제 자손과 백성을 지키려 한들, 그렇게 되겠는가?

무능한 만력제부터 급사한 태창제, 어리석은 천계제로 이어지면서 명나라는 군주를 보좌할 유능한 재상은 사라지고 환관이 날뛰면서 쇠망의 징후가 뚜렷해졌다. 그랬으므로 제법 영명했던 숭정제조차 손 쓸 여지가 없었다. 1644년, 李自成(이자성)이 수십 만 반란군을 이끌고 북경에 입성했을 때, 북경 성문은 열려 있었다. 숭정제는 반란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의 충고와 도움을 얻으려고 소집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개와 절개 있는 선비는 조정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숭정제는 자금성 후원으로 가 동산 기슭 나무에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명나라는 만주 기마병이 들이닥치기 전에, 아니 이자성이 북경에 입성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 무너졌다.

다시 ‘명이대방록’ 한 대목을 들어보겠다. “君爲己死而爲己尨, 吾從而死之亡之, 此其私暱者之事也. 是乃臣不臣之辨也. 世之爲臣者, 昧於此矣, 以爲臣爲君而設者也. … 君臣之名, 從天下而有之者也. 吾無天下之責, 則吾在君爲路人. 出而仕于君也, 不以天下爲事, 則君之僕妾也; 以天下爲事, 則君之師友也.”(군위기사이위기방, 오종이사지망지, 차기사닐자지사야. 시내신불신지변야. 세지위신자, 매어차의, 이위신위군이설자야. … 군신지명, 종천하이유지자야. 오무천하지책, 즉오재군위로인. 출이사우군야, 불이천하위사, 즉군지복첩야; 이천하위사, 즉군지사우야)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