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죽을 순(歹-6)장사지낼 장(艸-9)
진나라의 융성이 멈춘 것은 목공이 재위 39년만에 죽으면서 수많은 인재들을 殉葬(순장)시켰기 때문이다.
진나라에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이런 가혹한 풍습을 목공도 폐지하지 못하고 따랐던 것이다. 목공의 죽음과 더불어 따라 죽은 사람들의 수는 177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훌륭한 신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으니, 목공 사후에 진나라에는 인재가 텅 비었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목공이 끊임없이 인재를 찾아서 구하고 발탁한 일이 참으로 虛事(허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를 두고 당시 군자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秦繆公廣地益國. 東服彊晉, 西覇戎夷. 然不爲諸侯盟主, 亦宜哉. 死而棄民, 收其良臣而從死. 且先王崩, 尙猶遺德垂法, 況奪之善人良臣百姓所哀者乎? 是以知秦不能復東征也.”(진목공광지익국. 동복강진, 서패융이. 연불위제후맹주, 역의재. 사이기민, 수기양신이종사. 차선왕붕, 상유유덕수법, 황탈지선인양신백성소애자호? 시이지진불능부동정야)
“진나라 목공이 영토를 넓히니 속국이 늘었다. 동쪽으로는 강력한 晉(진)나라를 굴복시켰고, 서쪽으로는 오랑캐 지역을 재패했다. 그러고도 제후들의 맹주가 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죽은 뒤에 백성을 버리고 훌륭한 신하들을 따라 죽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선왕들은 죽으면서 늘 좋은 제도와 법을 남기려 했거늘, 하물며 착한 사람과 훌륭한 신하를 산 채로 죽였으니, 백성이 슬퍼하지 않았겠는가? 이로써 진나라가 동방으로 다시 진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노라.”
진나라가 순장 제도를 폐지한 것은 전국시대 들어와 獻公(헌공, 기원전 385∼362 재위)이 즉위하면서였다. 그리고 헌공 때 비로소 진나라는 동쪽 중원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했다. 헌공이 죽고 그 아들 효공이 즉위해서는 상앙을 기용하여 전면적으로 개혁을 단행한 결과, 부국강병을 이루고 영토를 넓히며 장차 천하를 통일할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 제도든 풍습이든 어질고 올바르지 않거나 시의적절하지 않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정체되거나 쇠퇴하고 만다는 것을 목공과 진나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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