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亦知夫水與月乎
그대는 저 물과 달을 아는가
소동파의 시 ‘적벽부’의 일구다.
임술년 가을 기망에 소동파는 객과 더불어 배를 띄우고 적벽 아래에서 노닐었다.
맑은 바람은 서서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더라(…)’ 조금 있으니
달이 동산 위에 나타나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배회한다.
흰 이슬은 강 위에 비껴 내리고 물빛은 하늘에 닿아 있다.
이때 어떤 객이 퉁소를 부는데 그 소리가 원망하는 듯 흐느끼는 듯했다.
동파가 “어찌 곡조가 슬프냐?”고 물었다.
객은 적벽강에서 참패한 조조를 떠올리며 “진실로 일세의 영웅인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세상에 붙어 있는 것은 마치 하루살이의 짧은 삶을 천지간에 의탁한 거와 같고,
아득한 창해(滄海)의 좁쌀 한 알이라.
내 일생의 수유함을 슬퍼하고 강산의 다함 없음을 부러워하네.
이 맑은 경치를 영원히 누릴 수 없으니 그것을 슬퍼한다”고 말한다.
이때 동파의 위로가 우리를 향한다.
그대는 저 물과 달을 아는가?
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다지만 그러나 일찍이 가는 것만이 아닌 것을.
차고 비움(영허·盈虛)이 저와 같으나 마침내 소장(消長)할 수 없음이라.
물이 흐르되 다 흘러가 버린 적이 없고,
달이 만월이 되거나 초승달이 돼도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영허소장은 현상계의 작용일 뿐, 본체는 변하지 않는다.
대저 그 변하는 자,
스스로 볼진대 곧 천지도 일찍이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을.
변역(變易)이다.
그러나 그 변하지 않는 자, 불역(不易)의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음이다.
천지만물은 오직 하나의 근원이라. 나고 죽음이 따로 없다.
이때의 만물과 나는 영원한 것을, 어찌 인생이 짧다고 비탄에 잠길 필요가 있겠는가.
도(道)는 만물을 변화시키지만 그 자신, 본체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의 섭리를 담은 글이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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