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큰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고려 때 문장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중 ‘슬견설’(蝨犬說)의 한 대목이다. 제목 그대로 이(蝨)와 개(犬)의 죽음을 놓고 생명에는 차등이 없다는 평등사상을 일깨운다. 아주 오래전 휴가 나온 시동생의 군복을 세탁할 때였다. 옷에 이가 많았다. 벌건 연탄 화덕을 꺼내 놓고 그 위에서 옷을 털었다. 타닥타닥 탁! 통쾌했다. 그 후 내가 읽은 ‘슬견설’에서 이규보는 어느 젊은이가 큰 몽둥이로 개를 때려죽이는 것을 보고 경악하자 하필 이글거리는 화로를 끼고 앉아 이를 잡아 태워죽이는 것에 비교하며 생명에는 차등이 없음을 설파했다.
“무릇 피와 기운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말·돼지·양·벌레·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 그런즉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잠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모기나 거머리나 이는 모두 해충이 아닌가? 인간을 미워한 나머지, 인간을 없애기 위해서 호랑이, 곰, 늑대, 파리, 모기 이런 것들을 창조한 것이 아니냐고, 마치 나 같은 사람을 대변이라도 하듯 이규보가 조물주에게 따져 묻는다. 그러자 조물주는 ‘문조물’(問造物)이라는 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그대가 묻는바, 사람과 물건은 모두 태초부터 정해진 질서에 따라 자연히 생기는 것이니 하늘이 알지 못하고 조물주도 역시 알지 못한다. 무릇 사람이란 저 스스로가 태어날 뿐이지 하늘이 냄이 아니며, 오곡과 뽕나무, 삼들도 저 스스로 난 것이요, 하늘이 낸 것이 아니로다. 하물며 어찌 이로운 것과 독한 것을 분별해 일부러 사람을 이롭게 또는 괴롭게 하겠는가….”
그렇다. 자연은 만물에 대해 사정(私情)으로 간섭하지 않는다. 이해득실은 다만 우리의 관점일 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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