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文 文法

한문문법 12 - 허자(虛字)의 용법 ⑫ 이(而)

bindol 2021. 9. 23. 11:32

1. 이(而)자는 連接關係詞로서 너무나 廣範圍하게 쓰이기 때문에 어떤 이(而)자 써야 되며, 어떤 경우에는 써서는 안되는지 상당히 곤란한 때가 많다. 특히 앞에서 설명한 「則」字와의 關係도 아울러檢討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而)자의 二大用法이라면, 하나는 順接이고 하나는 逆接이다. 이는 「則」字도 마찬가지 였다. 「則」字와 比較한다면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1) 「則」字 이(而)자는 똑같이 承接句에 쓰일 수 있고, 그 位置가 서로 같으면서도 作用은 다른 것이다. 물론 逆接의 이(而)자와「則」字는 뚜렷한 差異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順接의 경우에도「則」字 이(而)자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이것은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경우라고 하겠다.

2) 「則」字 이(而)자는 똑같이 對比句와 轉折句에도 쓰일 수 있기만, 句文中의 位置는 같지 않다. 그러다 그 作川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이것은 다르면서도 같은 경우라 하겠다.

順接의 경우 이(而)자는 上下兩事가 서로 相應하는 때이고, 逆接 의 경우는 上下兩事가 서로 背馳되는 때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限界를 分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단지 이(而)자 하나만을 사용하여 그 영향되는 根本作用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對比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예로,

예1) 物美

물건도 좋고 값도 싸다.

예2) 男耕女織。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짠다.

예3) 好逸惡勞, 人之常情。

安逸을 좋아하고 勞苦를 싫어함은 사람의 常情이다.

예4) 兵在精不在多。

군대는 精銳에 있고, 多數에 있지 않다.

예5) 世人徒見其利不見其弊。

世人들은 한갖 그 이익만을 보고, 그 弊害는 보지 아니한다.

예6) 室邇人遠。

집은 가깝지만, 사람은 멀다.

예7) 其言若是行若彼。

그의 말은 이와 같지만, 그의 행동은 저와 같다.

예8) 我國尙儀式西人尙自然。

우리 나라에서는儀式을 숭상하나,西洋人들은 自然스러움을 숭상한다.

以上의 例文에서 앞 예1) 예2) 예3) 은 모두 바꾸어 쓸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價廉而物美」, 「女織而男耕」, 「惡勞而好逸」이라고 表現하여도 아무 意味上의 差異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而)자의 根本性格을 알 수가 있다. 그 다음 두 例文 예4) 예5) 은 두 가지 事實이 서로 相反되면서 主語에 다같이 從屬되어 있는 경우라 하겠다. 이때도 역시 「兵不在多而在精」, 「不見其弊而徒見其利」라고 바꾸어 쓸 수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例文 예6) 예7) 예8) 은 上下 두 가지 事實이 서로 相反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同時에 意味도 서로 賓主의 關係에 있다. 만약 이것을 바꾸어 表現할 경우에는 특별한 注意를 要하는 것 이다.

그리고 이들이 順接인지 逆接인지를 區分한다면, 前예1) 예2) 예3) 는順接이고 마지막 예6) 예7) 예8) 는 逆接이며 中間 예4) 예5) 는 그 中間이라고 하겠다. 또한 句文의 形式上에 있어서 이들이 모두 對比句이므로, 우리는 이(而)자가 上下兩事實에 대한 連結關係에만 注意를 하고 두가지 事實의 向背에 대하여는 注意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첫째번 예1)에 있어서는 內容上順接의 경우와 逆接의 경우로 나누어 解釋할 수 있고 그意味도 다르게 된다. (물건도 좋고 값도 싸다 - 順接의 경우 ; 물건은 좋지만, 값은 싸다 - 逆接의 경우) 이러한 對比句 속의 이(而)자는 가끔 省略되거나 使用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즉 「物美價廉」, 「我國尙儀式, 西人尙自然」 또한 양쪽에 「則」字 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相反된 경우

뿐만 아니라 相亟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男則耕女則織」 또 相反된 경우에 「則」字를 한 곳에만 사용하여 「我國尙儀式, 而西人則尙自然」이라고 쓸 수도 있다. 「則」字를 써서 表現하던 그 語氣는 强調된다.

2. 順接의 이(而)자는 때로 「則」字와 混同되기 쉽다. 이것은 이(而)자의 作用이 비록 先後를 連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이(而)자가 連結하는 두 가지 事實은 先後의 分別을 벗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前項의 例文은 모두 並列的인 內容이다. 그러나, 아래의 例文은 확실히 이것과는 다르다.

예9) 臨溪釣漁, 溪深魚肥; 泉爲酒, 泉香

시내에 나가 고기를 낚으니, 시내가 깊어 고기는 살찌고; 샘물을 빚어 술을 만드니, 샘물이 향기로와 술맛이 시원하다.

예10) 開其音知其姓氏, 審其語知其是非。

그 소리를 듣고서 그 姓氏를 알고, 그 말씨를 살펴서 그 是非를 안다.

예11) 或求得之, 或求不得。

혹은 구하여 얻고, 혹은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 (두째번「而」字는逆接이 다) 

예12) 吾何以識其不才舍之?

내가 무엇을 가지고 그가 재주가 없으니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인가?

예13) 疫癘昔人所觀爲神之遣者也, 今則知爲微生物之傳染可以豫防。

질병을 옛사람들은 神이 보낸 것으 로 보여졌으나, 지금은 微生物의 專染이라 알려져서 예방할 수 있다.

위의 예9), 예10)는 모두「則」字(3항)로 表現할 수 있다. 단지 이(而)자를 썼을 경우는 平凡한 直敍의 氣分이지만, 「則」字를 썼을 경우는 뚜렷이 앞의 事實이 뒤의 事實에 前提가 됨이 나타나기 때문에 斷定의 氣分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예11)는 명확 述句文이므로 「則」字로 바꾸어 수가 없다. (다만 「則」字의 (3)項例 세째번 것과는 비교될 수 있다.)

만일 句文안에 두 가지 事實이 연결되어 하나의 事實로 看做될 때는 다만 이(而)자를 쓸 수는 있지만, 「則」字를 사용할 수는 없다. 예12)이 이와 같은 것이다. 가령 예12) 「則」字로 바꾸어 表現한다 면, 「吾何以」 三字는 없애 버려야 한다. 또한 예12) 「則」字를 써서 表現하려면, 아래와 같이 고쳐 表現할 수는 있다.

예14) 知爲微生物之傳染, 可以豫防。

질병이 미생물의 전염이라는 것임을 안다면 예방할 수 있다.

3. 다음 例文은 다만 時間上의 앞뒤로 이어지는 경우이고, 先後로 關係되는 사연은 없는 경우이다. 이것은 또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가 있다. 첫째는 어떤 일이 平凡하게 이어지는 경우로서 대개 한 사람(하나의 主語)의 行爲에 대한 敍述이다. 예로,

예15) 王顧左右言他。

王은 左右를 돌아보면서 다른 것을 말했다.

예16) 至暮, 焦所遇返。

저녁 때까지 만나지를 못하고 돌아왔다.

예17) 起, 起歸。

깨어나서 일어나고, 일어서서 돌아왔다.

예18) 食之。

이에 삶어서 먹었다.

예18) 反而登舟, 放乎中流, 聽其所止而休焉。

돌아와서 배를 타고, 中流에 틔워 그것이 멈추는 데에 따라 휴식했다。

以上의 例는「則」字의 (1)項 예1), 예2), 예3) 과 比較된다. 그러나 위에서는 예17)을 除外하고서는 「則」字를 쓸 수가 없다. 왜냐하 면 「則」字를 사용하는 句文은 먼저 어떤 일을 들어서 그 다음 일에 대한 時間關係를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가지 일이發端된 후에 약간 멈추는 기분이 나타나고 다음에 나타나는 일을 설명하는 表現이다.

그러나, 이(而)자는 다만 하나의 일을 하면서 또 하나의 일을 하는 一貫性이 있다. 따라서 위의 예17)에서도 「則」字를 쓸 때와 이(而)자를 쓸 때는 表現上의 差異가 있는 것이다. 즉,

예19) 起, 起歸。

깨어나서 일어나고, 일어서서 돌아왔다.

예20) 起, 起歸。

깨어나자 일어나고, 일어나자 돌아왔다.

위에서 앞의 것은「깨어난 것」과「일어난 것」이 先後關係라고 하겠지만, 뒤의 것은 거의 同時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음 또 한 가지로는 이(而)자를 사용하는 句文이 어느 한 가지 일을 들어서 다른 일의 時間關係를 설명하는 것은 마차가지이지만, 그 氣分은 여전히 一貫性이 存在하며, 멈춘다거나 曲折이 없는 경우이다. 이때 두개의 動詞는 다같이 하나의 主語를 가지는 경우도 있고 主語가 각각 다를 수도 있다. 예로,

예21) 敏悟, 讀書過目成誦。

어려서 영리하여, 책을 읽으언 보는 대로 외웠다.

예22) 宜未綢繆, 臨渴掘。

비가 오지 않을 적에 준비함이 마땅하고, 목이 마를 때가 되어서 샘을 파지는 말아라.

예23) 日出作, 日入息。

해가 뜨자 일하고, 해가 지면 쉰다.

위의 예21), 예22)에서는 이(而)자를 사용하지 안해도 무방하다.

4. 다음 例文의 이(而)자는 두가지 事實이 時間上의 先後를 따지기 어렵고, 또 事理上에 있어서도 서로 聯關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예24) 識見旣高, 學力又足以副之。

識見도 이미 높고, 學力도 족히 이에 副應할 만하다.

예25) 此公之吉, 士亦以此望於公也。

이것은公의 뜻이니, 선비들도 이 때문에 公에게 기대한다.

예26) 中國之晝與書法爲緣, 多含文學之趣味; 西人之晝與建築彫爲緣,而佐以科學之觀察, 哲學之思想。

中國의 그림은 書法과 緣關이 되고, 文學的인 趣味를 많이 含有하고 있지만 ; 西洋人의 그림은 建築이나 彫刻과 因緣이 되어 科學的인 觀察이나 哲學的인 思想을 돕는다.

이러한 例는 1項의 앞 例文과 똑같은 用法이라 하겠지만, 여기서는 句文의 形式이 對比句로서 整齊되지 못한 것 뿐이라 하겠다. 이(而)자는 時間上이나 事理上의 承接關係를 떠나서 두가지 일을 聯繫하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그 本來의 機能이다. 위에서 이(而)자 「則」字로 바꾸어 쓴다면, 그 뜻이 달라지거나 통하지 않게 된다. 또한, 위 例文에서 注意하여야 할 점은 이(而)자가 포함된 小句와 그렇지 않는 小句가 聯合되어 있을 때, 그렇지 않은 小句에는「旣」,「又」,「亦」등의 글자가 呼應한다는 事實이다. 이것은 곧 이(而)자가 順接性을 띠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나타내는 것이다.

5, 다음은 逆接性의 이(而)자에 대한 例文이다. 이것은 1項의 예6) 예7) 예8) 과 같은 것이지만, 아래의 例는 그 句文形式이 整齊되지 아니한 것이다.

예27) 識見雖高, 學力不足以副之。

識見은 비록 높지만,學力이 이에 부응할 만하지 못하다.

예28) 逝者如斯, 未嘗往也; 盈虛者如彼, 卒莫消長也。

가는 것은 이와 같지만, 일찌기 가버리지 안했고 ; 차고 비는 것은 저와 같지만 끝내 사라지거나 영원함이 없었다.

예29) 知其不可爲爲之者, 非下愚則聖賢也。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자는 아주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聖賢이다.

예30) 風俗之於人心, 始乎微終乎不可禦者也。

人心에 대한 風俗은 처음에는 미미하지만, 끝내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예31) 事至不能見, 見不能遠, 若是者必敗。

일이 닥쳤는 데도 알아볼 수 없고, 알고서도 멀리 할 수 없다면, 이같은 사람은 반드시 패한다.

위에서 이(而)자 「그러나」, 「그렇지만」과 같은 意味이다. 첫째 例에서 「雖」字를 사용한 것을 보면 더욱 그 뜻이 뚜렷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而)자 4項과 비교된다. 우리는 이미 「物美而價廉」이라는 句文이 順接과 逆接의 두가지 解釋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살펐다. 句文中에 「又」字를 쓰거나 「雖」字를 加하는데 따라서 이러한 關係는 더욱 뚜렷해진다. 예로,

예32) 物旣美廉。

물건은 이미 좋고, 가격도 싸다.

예33) 價旣廉美。

가격은 이미 싸고, 물건도 좋다.

라고 하면, 이것은 順接의 경우이고,

예34) 價不昻。

물건은 좋지만, 가격은 오르지 안했다.

예35) 物不劣。

가격은 바록 싸지만, 물건은 나쁘지 않다.

라고 하면, 逆接임에 들림이 없는 것이다. 이제 앞의 例文에 대하여 時間性의 有無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은 接續關係詞에 있어서 時間關係는 이(而)자 「則」字를 사용하는데 問題가 되기 때문이다. 예27) 예28)은 時間關係가 없는 경우이다, 예29) 예30) 예31)는 時間關系가 있는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逆接의 경우는 時間關係와 相關이 안된다. 만약逆接의 이(而)자 「則」字로 고치면 뜻이 通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예36) 知其不可爲爲之。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예37) 始乎微終乎不可禦。

처음 미미했다면 끝내 막을 수 없다.

이와 같은 表現은 逆說的인 경우면 모르되, 順理的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則」字 밑의 말은 反對로 고쳐야 한다. 즉,

예38) 知其不可爲不爲。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면 아니한다.

예39) 其始徵其終亦不鉅。

처음이 미미했으면 끝에도 크지 못하다.

예31)  이(而)자 「則」字로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則」字는 역지 逆接의 意味(「則」字의 5項)인 것이다. 逆接의 경우 이(而)자는 대부분 省略되지 아니한다.

6. 主語와 述語사이에서 이(而)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예로,

예40) 匹夫爲百世師, 一言爲天下法。

匹夫가 百世의 스승이 되고, 한마디 말이 天下의 법이 된다.

예41) 獨未見夫僕乎? 十人從人者, 寧力不勝智不若耶? 畏之也。

유독 奴僕을 보지 못하였는가? 十人이 一人을 따르는 것은, 어찌 힘이 지혜를 따르지 못하여, 이같이 함이 아니겠는가? 이것 (지혜)을 두려워함이다.

예42) 大兵所過, 殆十室九空。

많은 군사들이 지나간 곳에는, 거의 열 집이면 아홉은 빈다.

예43) 一身兼十七職, 一時顯赫, 莫與倫比。

한 몸으로十七職을 겸하여 一時에 현저하게 나타나서, 더불어 비교할 수가 없다.

이때에 이(而)자 예40) 예41)에서는 逆接의 用法(「오히려」라는 뜻)이라고 하겠고, 예42) 예43)은 順接의 用法으로 마치 「則」字 7項의 경우라 하겠다. 이때도 역시 이(而)자가 接續關係詞 앞에는 變함이 없다.

7. 위와 같은 句文形式은 가끔 假說의 뜻이 包含된다. 예로,

예44) 無心, 終身成。

사람이 뜻이 없다면, 終身토록 성공하지 못한다,

예45) 大難臨頭, 人民猶不信任政府, 政府猶不絶對負責, 則國將不國。

큰 어려움이 迫頭했음에도 入民들은 오히려 政府를 信任하지 아니하고, 政府는 그런데도 絶對的인 責任을 지지 못한다면 나라는 장차 나라꼴이 아니리라.

예46) 危險, 則群中之人必須出萬死不顧一生之計以保之。

여러 사람이 위협하다면, 여러 사람 中에 있는 사람은 모름지기 만번 죽더라도 한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計策을 내서라도 이를 보호하여야 한다.

예47) 苟事事躬親, 將掛一漏。

만약 일마다 몸소 친하려 하면. 장차 한 가지에 걸려서 만 가지를 빠뜨리리라.

위에서 이(而)자의 역할은 「若」字와 비슷하다. 그러나 句首에 이미 「若」字  「苟」字가 사용된 경우에도 이(而)자는 다시 사용할수가 있다(예47)). 여기서도 이(而)자의 本憃는 逆接의 關係詞인 것이다. 이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경우라 하겠다,

예48) 人當立志無志, 終身無成。

사람은 마땅히 뜻을 세워야 하는데도 뜻이 없다면, 終身토록 성공하지 못한다.

예49) 群不可危險, 危險…

여러 사람은 危險을 당해서는 안되는 데도 위협을 당한다면…

과 같은 意味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8. 이(而)자는 그 앞이나 바로 뒤에, 뜻이 있는實字를 同伴하여 熟語로 쓰이는 例가 많다. 즉 「已而」, 「旣而」, 「而」, 「久而」, 「始而」, 「繼而」, 「而後」등이 있다. 예로,

예50) 父怒之, 復如初。

아버지가 성이 나서 종아리를 때렸으나, 이윽고 다시 처음과 같았다.

예51) 斥不以爲子,悔之。

배척하여 자식으로 생각하지 안했지만, 이육고 이를 뉘우쳤다.

예52) 忽一人大呼「警報」走, 百千人相告以「警報」走。

홀연히 한 사람이 크게 「경보」라고 소리치고 달아났다. 이윽고 수백 수천인이 서로 「경보」라고 하면서 달아났다.

예53) 久習與具化。 (順接)

오래 되자習慣化되고具體化되었다.

예54) 久不怠焉。 (逆接)

오래 되어도 게으르지 아니했다.

예55) 聞其言, 喜, 疑, 終乃大怒。

늙은이는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기뻐하더니, 계속해서

의심하고, 마침내 크게 노했다.

예56) 試驗數十次成。

수집번 시험한 뒤에 성공하였다.

예57) 有治法有治人。

法을 다스린 뒤에 사람을 다스림이 있다.

예57)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앞의 이(而)자는 별 뜻이 없고 「後」字의 意味가 主가 된다. 이러한 例로는 「而又」,「而且」,「而復」,「而乃」등도 같다 하겠다.

9. 以上에서 우리는 이(而)자가 하나의 小句文과 또 하나의 小句文사이에서 사용되는 경우를 살펴봤다. 그러나, 이(而)자 「以」字처럼 品詞와 品詞 사이에서 通接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而)자는 名詞와 名詞 사이에서 마치 「與」字와 같이 사용되는 例가 周秦古書에서는 많이 發見되지만은 그후에는 使用例가 없어졌다. 이(而)자가 두개의 形容詞를 連接하는 것은 아주 普遍的인 用法이다. 이때에는 그것이 述語로 쓰였을 경우도 있고, 附加語로 쓰였을 경우도 있지만, 附加語일 경우는 그 다음에 대부분 「者」字가 따르기 마련이다. 예로,

예58) 凡將欲智嚴, 智則不可測, 嚴則不可犯。

무릇 장수는 지혜롭고도 얻술하려 한다. 지혜로우면 추측할 수가 없고, 엄숙하면 犯接할 수가 없다.

예59) 語其淺近者如此, 其深微者可以會不可以言傳也。

 淺近한 것을 이같이 말한다던. 深微한 것은 뜻으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말로 전할 수는 없다.

예60) 東道夷邑, 西道險近。

동쪽 길은 평이하나 멀고. 서쪽 길은 험난하나 가깝다.

위의 例文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而)자의 用法은 두개의 小句文을 連接하는 경우와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이들은 대부분 順接의 경우이기만 위의 예60) 와 같이 逆接의 경우도 있다. 또한, 이(而)자는 相反되는 두 개의 形容詞를 連接시키는데 아주 자주 쓰임을 알 수가 있다. 예로,

예61) 不淫, 哀不傷。

關雎篇은 즐거우나 음난하지 않고, 구슬프나 마음 상하지는 않는다.

예62) 不倨, 曲不屈。

솔직하나 거만하지 않고, 간곡하나 屈從은 아니한다.

예63) 晋文公不正, 齊桓公正不譎。

晋文公은 간사하고도 올바르지 못하고, 齊桓公은 올바르고도 간사하지 않다.

예64) 左右皆惡之, 以爲貪不知足。

左右에서 모두 이를 싫어했으니, 貪慾스럽고 만족한 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위의 예61) 예62) 는 어떤 일에 대한 辨別에 있다. 이는 逆接의 경우라고 하겠으며, 예63) 예640) 는「譎」과 「不正」, 「貪」과 「不知足」이 서로 같은 部類의 內容이므로 順接의 경우라 하겠다.

10. 이(而)자는 또한 副詞와 形容詞, 혹은 副詞와 動詞를 連接시키는데 쓰인다. 예로,

예65) 侃侃談, 呱呱泣。

깐깐하게 말을 하고, 으앙으앙 운다.

예66) 率爾對, 笑。

솔직히 대답하고, 빙그레 웃는다.

예67) 山鳴谷應, 風起水; 余亦悲, 肅然恐。

산울림에 골짜기는 메아리치고, 바람이 일자 물이 용솟음쳤다. 나도 초연히 슬퍼지고 숙연히 두러웠다.

예68) 下則幽谷, 窈然深藏; 中有淸泉, 然而仰出。

아래에는 그읏한 골짜기가 아득하게 깊숙히 숨어 있고 ; 중간에는 맑은 샘이 있어 滃然히 (물이 치솟는 모양) 위로 솟았다.

이러한 副詞는 그 아래의 形容詞나 副詞가 결코 平面的인 關係라고 볼 수는 없고, 그들을 修飾하고 있는 關係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이(而)자는 쓸 수도 있고 省略할 수도 있다. 이것은 句文에 字數의 奇偶關係에 따라서 定해친다고 발할 수 있다. 예68)에서 이(而)자는 오히려 省略하는 편이 좋다고 하겠다.

11. 어느 名詞가 句文中에서 副詞와 같은 역할을 하였을 때는 가끔 이(而)자를 그 밑에 오는 動詞에 連接시킨다. 예로,

예69) 往, 暮歸。

아침에 가서, 저녁에 몰아온다.

예70) , 夏出。

겨을에는 숨었다가, 여름에 나온다.

예71) 一日行千里。

하루에千里를 간다.

예72) 一言決耳, 何喋喋爲?

한마디로 결정할 뿐인 것을,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리오?

위와 같은 例는 이들 名詞 위에 실은 하나의 關係詞나 關係詞와 같은 動詞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즉 暮」(저녁이 되어), 「以一言」(한마디로 써)와 같이 「抵」字나「以」字는 나타내지 안했다고 하겠다. 아래와 같은 例는 이러한 關係詞를 나타내 쓴 경우이다.

예73) 雨聲自遠至。

빗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린다.

예74) 人亡政息, 自古然。

사람이 죽으면 정치도 끝난다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다.

예75) 專制政治之毒, 至晩近二百餘年來甚。

專制政治의 害毒은 最近二百餘年 이래로 더욱 심해쳤다.

예76) 先天下之憂憂, 後天下之樂樂。

天下의 걱정을 먼저 하여 걱정하고, 天下의 즐거움을 뒤로 하여 즐거워 한다.

예77) 人材以培養出, 器識以歷練成。

人材는 배양함으로써 나오고, 기계에 대한 지식은 경력과 연습으로써 이루어진다.

12. 실제로 많은 句文上에서 이(而)자가 두 개의 動詞를 連接할 때, 그 地位는 결코 平等한 關係만은 아니다. 앞에서 한 行動이 아래에서는 그 手段이나 方法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作用도 마치 副詞的인 附加語 와 가깝게 나타난다. 예로.

예78) 順流東。

흐름을 따라서 東으로 간다.

예79) 席地倚牆坐。

땅에 자리잡고 담을 기대고서 앉았다.

예80) 無翼飛, 無足坐。

날개 없이 나르고, 발 없이 뛰어간다.

예81) 不勞獲, 不期遇, 不寒粟。

힘들이지 않게 얻고, 기대하지 안했는데 만나고, 춥지도 않은데 소름이 났다.

위에서 이(而)자「~하면서」라는 意味로서 그 다음에 오는 動詞에 대한 附加語的인 性格이 뚜렷하다.

13. 이(而)자의 또 다른 用法의 하나는 이(而)자바로 밑에 「上」,「下」, 「東」,「西」와 같은 方位를 나타내는 말이 連接되어서 時間,地域, 數量 등의 名詞뒤에 쓰이는 것이다. 예로,

예82) 宜昌, 江行平地, 不復急。

宜昌에서부터 東쪽은 江이 平地를 지나서 다시는 急流하지 아니한다.

예83) 溫飽, 他無所求。

따뜻하고 배부른 것 외에 다른 것은 구할 것이 없다.

예84) 吾無憂矣。

지금 이후에는 나는 격정이 없으리라.

예85) 名, 謂之道。形者, 謂之器。

形態以上의 것을 道라 이르고, 形態以下의 것을 器라고 한다.

위에서 이(而)자의 作用은 대개 「之」字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전히 이(而)자의 일반 用法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즉「宜昌而東」이란 말은「自宜昌而東」이라는 말과 똑같은 것이며, 여기서 「東」字는 動詞로 「東쪽으로 간다」는 뜻인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이(而)자 「以」字처럼 그렇게 常用되지는 않는다. 이(而)자는 그 用例에 限界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而外」 「而後」라고는 쓸 수 있으나, 「而內」,「而前」이라고는 쓸 수 없고, 「以內」, 「以前」이라고만 쓸 수 있는 것이다.

14. 아래 句文中에서 이(而)자「至」字와 비슷하다. 그러나 좀더 명확하게 말하자던, 하나의 「至」字나 혹은 그에 합당한 다른 動詞가 省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로,

예86) 由小大, 自近遠。

작은 데서우터 큰 데까지 이르고, 가까운 데서 먼 곳에까지 이른다.

예87) 自系長課長,自課長次長。

系長에서부터課長에 이르고, 課長에서부터 次長에 이른다.

예88) 十, 十百。

하나에서부터 열이 되고, 열에서부터 백이 된다.

마지막 例는「至」字는 勿論이거니와 「由」字까지도 省略되었다. 이와 같은 例로 어떤 句文에 있어서는 이(而)자가 表面上으로는 「至」字와 같이 쓰였으나 實質的으로 「至」字나 혹은 「至於」라는 말을 省略하여 쓰이는 경우가 있다. 예로,

예89) 近而, 遠而桂, 莫不聞風響應。

가까이는 滬杭에까지, 멀리는 湘桂에까지 소문을 듣고 향응하지 않음이 없었다.

예90) 小而一家, 大而一國, 事權不一則亂。

작게는 한 집에 이르고, 크게는 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일과 권력이 한결같지 않으면 혼란스럽다.

예91) 上而王公卿相, 下而工藝雜流, 凡有名者, 往往留像於館。

위로는 王公卿相에서, 아래로는 工藝雜流에 이르기까지, 무릇 有名한 사람은 왕왕 집에 사진을 남겨 놓았다.

이와 같은 句文의 特徵은 반드시 두 가지 相對되는 事例(遠近大小)가 따르며, 아울러 그 밑에 說明하는 말이 있어야만 비로소 句文이 完成된다.

출처 : 신아사출판 홍인표저 한문문법(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