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시대 주소 체계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건물로 구분 지었대요

bindol 2021. 11. 3. 19:18

 조선시대 사용된 호패 모습이에요. 지금의 신분증과 같은 것으로 16세 이상 남자만 차고 다녔어요.새해에는 우리나라에서 시행하는 여러 가지 제도가 달라져요. 이 가운데 우리 생활과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은 바로 '도로명 주소' 사용이랍니다. 지난해까지는 지번(★) 주소를 썼어요.

지번 주소는 토지를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눈 다음, 번호를 매겨 주소로 삼은 것이에요.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행정구역과 번지로 이루어진 지번을 통해 건물의 위치를 나타냈지요. 지번 주소는 일제가 우리 땅에서 토지조사사업을 마친 1918년부터 사용되었어요.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떤 주소 체계를 썼을까요?

"3품 이하는 '아무 관, 성명, 거처 아무 곳, 아무 리'라 쓰는데 서인(★)도 또한 같으며, 다만 얼굴은 무슨 색이고 수염이 있는지 없는지를 덧붙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조선 태종 때인 1413년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말입니다. 오늘날의 신분증과 같았던 '호패'에 적을 내용에 대한 기록이지요. 이 기록을 보면 호패에 어떤 사람의 거처를 '아무 곳, 아무 리'라고 새겼음을 알 수 있어요. 그 거처가 바로 오늘날의 주소에 해당하지요. 호패 제도는 고려 공민왕 때 병사들에 한하여 처음 실시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다가 조선 태종 때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 뒤 성종 때인 1485년에 상당부원군 한명회가 왕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어요.

"다섯 가구를 한 통(統)으로 만들고, 마을 안에서 유식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통 안의 인구의 많고 적음과 식량의 있고 없음을 살펴 분배하게 하면 때맞추어 구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공로를 따져보아 상을 주면 어떠하겠습니까?"

말이 조금 어렵지요? 한명회는 5개 집을 하나의 통(統)으로 묶고, 집마다 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마을의 행정조직을 만들자고 건의했어요. 이를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라고 해요. 이 오가작통법이 조선시대 주소 체계가 되었지요. 이는 토지가 아닌 집, 즉 건물을 주소의 기초로 삼은 것이었어요. 한명회의 의견에 따라 시행된 오가작통법은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도 올랐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세종 때에도 이에 대한 건의가 있었고, 단종 때에도 시행된 적이 있었다고 해요.

 경국대전은 조선시대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법전이에요. 성종 임금 때 완성되었어요. /Getty Image/멀티비츠

경국대전에 따르면 한성부에서는 방(坊) 밑에 5개 집을 1통으로 하여 통주(★)를 두었어요. 지방에서도 5개 집을 1통으로 하며 5통을 1리(里)로 하고, 몇 개의 리(里)를 묶어 면(面)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꼭 다섯 집을 1통으로 한 것은 아니었어요. 지역 형편이나 시대 상황에 따라 집의 수를 늘려 10개 집을 1통으로 하는 '십가작통(十家作統)'을 시행한 경우도 있답니다.

새로 사용할 도로명 주소는 도로 이름과 건물 번호로 이루어져 있어요. 전에 사용하던 지번 주소와 시·군·구 및 읍·면까지는 같지만, 동(洞)·리(里)·지번·아파트명(名) 대신 도로 이름과 건물 번호를 사용합니다. 올해부터 우리 집과 친구들의 집 주소가 어떻게 바뀌는지 어린이 여러분도 한번 찾아보세요.


★지번(地番): 토지의 일정한 구획을 표시한 번호. '토지 번호'로 순화.

★서인(庶人): 관직이나 사회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보통 사람을 이르는 말.

★구황(救荒):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빈민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함.

★호(號): 같은 번지 내에 집이 여럿 있을 때 일정하게 순서를 매겨 쓰는 말.

★통주(統主): 조선시대 일반 백성이 사는 집의 조직 편성 단위였던 통을 관리하던 책임자. 뒤에 통수(統首)로 고침.

지호진 | 어린이 역사전문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