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1] 피해국에 대한 연대가 헌법 정신
1948년 정부 수립 후 한국이 당면한 최대 외교 과제는 대일(對日) 강화조약 참가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동란(動亂)의 와중에도 필사의 외교 노력을 기울였으나, 연합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논점은 한국이 일본 통치에 얼마나 저항했으며, 대일 전쟁에 얼마나 기여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1949년 12월 미 국무부 보고서는 “교전 당사자 지위를 주장하기 위해 한국이 제시한 증거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대 증거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중략) 한국 내의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은 국지적이거나 단기간 소요에 한정되었고, 한국민들은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대체로 일본 총독부의 통치를 받아들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해외 소재 단체 저항 활동의 실체성,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결국 교전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한국은 강화조약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러한 판단의 배경에는 한일병합에 대한 열강의 승인이 있었다. 통치권자의 명시적 반대와 정규군 간 교전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승인 근거였고, 이는 한국의 주권 회복 과정에서 두고두고 뼈아픈 통점(痛點)으로 남았다. 주권 침탈을 맥없이 용인했다는 반성과 주권 존중·민족자결의 세계적 조류에 힘입어 3·1운동이 저항의 기폭제가 되었다. 3·1운동의 여파로 성립된 임정(臨政)에 의해 구체제와 단절된 민주공화국의 씨앗이 배태(胚胎)된 것이 대한민국 건국사(史)다.
한국의 헌법은 3·1운동과 임정의 법통 계승을 기본 정신으로 명시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부당한 주권 침해, 무력 사용을 규탄하고 피해국을 향한 연대의식을 발휘하는 것은 국가 정체성과 직결된 헌법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역사와 헌법을 가진 나라에서, 주권 수호를 위해 결연히 저항에 나선 외국 정상을 향해 침략을 자초한 아마추어 정치인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기이하고도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선거 때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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