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6690)大漢門

bindol 2022. 10. 2. 19:57
[이규태코너](6690)大漢門 발행일 : 2006.01.04 / 여론/독자 A30 면
▲ 종이신문보기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이 중수되어 지난 연말 개통했다. 이 문 이름에 대해 낭설도 구구했었다. 덕수궁은 이태조가 계비인 강(康)씨 능에 행차했을 때 거처했던 이궁으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처럼 덕수궁의 정문도 남향을 한 화(化)자 항렬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고종황제가 덕수궁에 계셨을 때는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으로 승승장구한 일본의 후광으로 원치 않은 황제가 되면서부터의 일이다. 황제로서 독립됐다는 것은 황제가 직접 신으로부터 정치를 친수(親受)할 천단(天壇)이 필요했고 급조된 천단이 조선호텔 구내에 있는 환구단(?丘壇)이다. 이 상징적인 정치 친수 현장과 궁궐은 직통 직결돼야 한다 하여 남으로 틔었던 덕수궁의 정문을 환구단과 맞트이게끔 동남쪽으로 덕수궁 정문을 다시 낸 것이다. 이때 대문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덕수궁에 환궁해서 한동안 무당들이 정권을 쥐고 흔들었던 때가 있었다. 민황후의 환궁을 예언한 여주 무당 신령군(神靈君)이 세도가로 득세하고 있던 친로파 이범진(李範晋)을 앞세워 정국을 주름잡아 흔들었다. 갖은 복색의 무당들이 덕수궁에 널려앉아 복채로 정치를 하고 별의별 해프닝들이 연거푸 일어났었다. 러시아계 무당인 정길당(貞吉堂) 아부인(俄夫人)은 40년 전 그의 아버지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았었다는 오로지 그 한 연고만으로 동방정교를 내세우며 충청도 남포지방에서 몽매한 백성의 금품을 갈취하고 다녔다. 바로 그 아부인이 덕수궁 정문 위에 하강한다 하여 팔도의 무당들이 집결하기도 했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친일파인 배정자(裵貞子)라는 양장 여인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끼고 덕수궁 대안문을 드나들기에 국운이 갓 쓴 계집에게 치여 이 꼴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곧 덕수궁 문이름에 갓(보닛) 쓴 여인(安)으로 이 아부인과 왜부인을 지목했다.

이 풍문을 가라앉히기에는 당시 허약해진 국력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지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쳤고, 고친 후에도 친일파가 득세하자 대한문 글씨를 이완용이 썼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공식 기록에 대한문의 글씨는 당시 덕수궁 특진관이던 남정철(南廷哲)이 쓴 것으로 돼 있다.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