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잔디 안식일

bindol 2022. 10. 15. 11:01

[이규태코너] 잔디 안식일

조선일보
입력 2004.05.27 17:35
 
 
 
 

청산리 전투 때 독립군 지대장이었던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전투 당시를 회고하던 도중 갑자기 당시 불렀다던 군가를 불렀던 일이 생각난다.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는 질경이여라/ 짓누르고 짓이길수록 살아나는 뗏장이어라」 하는, 밟아도 아리랑이었다. 일제 때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철로공사에 징용되었던 한국인이 혹사를 감내하면서 불렀다던 노래도 질경이와 뗏장의 강인한 생존력에서 용기를 얻는 밟아도 아리랑이었다. 질경이는 수레가 밟고 다니는 길 복판에 자생하여 바퀴에 짓눌려도 잘도 살아난다 하여 차전자(車前子)로 불린 들풀이고, 뗏장은 옮겨 심기 위해 흙에 엉킨 뿌리째 떼어낸 잔디로, 밟아도 짓이겨도 살아나는 민족 저력의 상징으로 거론되는 야생초들이다. 독일의 식물사회학자 엘렌베르크의 「중유럽의 식생」에서는 어느 한 지역에 수천년 토착한 식생(植生)은 그 지역에 살아온 민족성과 닮는다는 사례를 열거했다. 한국 토착의 야생초인 질경이와 잔디는 바로 가뭄과 홍수와 전란 속을 각박하게 살아낸 한국의 민족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개화기 한국땅에 발을 디딘 서양사람들에게, 억세면서 조밀하며 밟을수록 잘 자라는 한국잔디가 놀라움의 표적이 됐었다. 당시 영문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보면 이 사실을 알고 미국 최대의 육종회사인 피터 헨더슨 회사에서 당시 미국 공사이던 알렌에게 그 씨앗을 보내달라고 의뢰했다. 시장에서 구할 수 없자 아녀자를 고용, 씨앗을 훑게 했으며 수요가 기하급수로 급증하자 배재학당 등 기독교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잔디씨를 수집, 미국 천지에 뿌렸다. 이 고려잔디는 미국의 테니스 코트, 골프장, 그리고 가정의 정원들에 앞다투어 심어졌다. 20여년 전 오클라호마 털사의 한 테니스코트에서 19세기 한국에서 들여온 잔디의 혼혈종이라면서 안내받았던 일도 있다.

원형 잔디밭으로 단장한 서울 광장의 잔디가 밟아서 망가져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안식일을 정하고 있는데 밟을수록 살아난다는 토종 뗏장으로 바꿔 깔아, 밟아도 아리랑의 정신력 과시의 광장이기도 했으면 한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