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17년 매미

bindol 2022. 10. 15. 11:05

[이규태코너] 17년 매미

조선일보
입력 2004.05.23 18:42 | 수정 2004.05.23 18:45
 
 
 
 

테러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은 5월 중순에 들면서 매미와의 전쟁을 병행하고 있다. 지금 미국 동부지방 전역에서 울어댈 공포의 매미울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미국신문이 없을 정도다.

17년 주기로 환생한다 하여 이름붙은 '17년 매미'는 동부 15개주에서 축구경기장만한 넓이에 약 100만마리가 밀집하는 가공할 발생을 한다. 수놈들은 자동차 엔진보다 큰 소리로 암놈을 불러대며 그 소음은 전화를 걸지 못할 정도요, 여름 내내 이명증(耳鳴症) 환자가 돼 있어야 한다.
이 맹렬 러브콜에 응해 몰려드는 암놈이 나무에 달라붙어 수액을 빨아대면 나무가 고사하기에 비닐로 나뭇가지에 옷을 해 입히기에 한창이다. 이렇게 맹렬히 사랑하여 맹렬 탄생한 매미 유충(幼蟲)들은 땅속에 들어가 17년이라는 맹렬 동면을 한다.

“부러운지고 울지 않는 아내를 둔 매미는…” 하고 고대 그리스 시인 크세르나르코스는 읊었다. 매미는 사랑을 위해 수놈만이 울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매미소리를 들으려면 그리스나 남프랑스까지 가야 하며 ‘이솝 이야기’ 속의 매미 이야기를 유럽에 옮길 때 매미를 모르기에 베짱이나 귀뚜라미로 옮기게 마련이었다. 미국에서는 매미를 시케이더(Cicada) 라 하지 않고 막연히 ‘우는 벌레’란 뜻인 로커스트(Locust)라 하는데, 유럽 이주민이 미국에서 매미 소리를 처음 듣고서 만든 이름이다.

 

목소리 큰 매미는 대만의 가례선(可禮蟬)과 세계 최대의 매미인 말레이반도의 제왕 매미로, 이들이 합창하면 산이 흔들린다 하지만 해가 지기만 하면 멎는다. 고려 때 문장 이규보(李奎報)의 방선부(放蟬賦)에 보면 매미는 이슬만 먹고 깨끗이 살며 해가 지면 울음을 멎어 거미의 음흉한 계략에 말려들지 않기에 선비의 기상이라 하여 예찬하고 있다.

미국 초기 이민의 지도자 프랭클린도 새벽에 일어나 부지런하게 일하고 해가 지면 일찍 잠드는 근로정신을 매미 정신이라 하여 권장한 것으로 미루어 초기 미국 매미들도 해가 지면 울음을 멎었던 것 같다. 한데 서울 매미도 밤을 잊고 자정까지 울어대는 작금 문명의 변수가 자연을 마냥 적으로 돌리고 있음을 이 17년 매미로부터 읽을 수가 있겠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