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WTO 만장일치제

bindol 2022. 10. 30. 16:19

[이규태코너] WTO 만장일치제

조선일보
입력 2003.10.02 15:32
 
 
 
 

세계무역기구(WTO)의 멕시코 칸쿤 각료회의 결렬 후 이 기구의 무용론이 대두되자 자구책 마련에 분주한데 그중 이제까지 지속해온 회원국 전원의 만장일치 제도를 없애기로 한다는 것이 들어 있다. 소수의 반대국이 있더라도 다수가 지지하면 의결하되 반대국은 그 의결로 받는 불이익도 혜택도 주지 않기로 한다는 것이다.

생업이 농사인 민족은 그 땅에 붙박이로 살아야 하는 정착이 불가피하고 서로 잘 아는 사람끼리 사는 정착사회에서는 소수가 웬만한 이견이나 반대의사를 나타내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여 다수에 수렴시키는 것이 미덕이 돼 왔다. 선생님이 “알았습니까”라고 물으면 반 학생들은 비록 모를지라도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선생님에 대한 도리가 돼 있는 것도 정착논리다.

커피 한잔 시키는 데도 핫커피냐 냉커피냐, 핫커피면 아메리칸이야 터키시냐, 아메리칸이면 밀크를 넣느냐 마느냐, 넣으면 한 방울이냐 두 방울이냐, 설탕은 넣느냐 마느냐, 넣으면 한 스푼이냐 두 스푼이냐, 짜증날 정도로 선택을 요구해 나가는 것은 유목이나 상업 등 뜨내기로 살아온 이동민족의 개성 존중 논리다. 누군가 “설렁탕!” 하면 “나도, 나도”로 만장일치하는 정착 논리의 한국인들은 무섭도록 불일치를 추구하는 개별 논리에 짜증이 난다.

 

심지어 유목생활의 본고장 사람인 유대인에게는 ‘만장일치는 무효’라는 관행이 있다고 들었다.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이스라엘 의회에서 국빈으로 연설하는데 한 여성의원이 사사건건 이 국빈을 물고 늘어져 다른 의원들의 짜증을 샀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의원을 의회장 밖으로 내쫓자는 발의를 하여 만장일치로 가결이 되었다.

한데, 이 의원은 유대의 법 관행에 ‘만장일치는 무효’라는 것을 들어,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해프닝이 있었다. 옛 유대의 국회 겸 최고재판소인 산헤드린에서는 사형죄나 중대한 사항에서 전원이 일치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한다. 판정에 경솔하고 외풍이 작용할 우려를 배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곧 만장일치는 소수 의견을 묵살하는 독재적 자의가 끼일 우려가 없지 않아 무효론이 명맥을 유지해온 것일 게다. WTO의 만장일치 무효가 소수약세 의견인 개발도상국에 유리하게 전개돼야 마땅한데 오히려 발언권을 약화시켜 선진국을 유리하게 할 수도 있어 주목된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