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조흥은행
조흥은행 전신인 우리나라 최초의 한성은행은 20칸짜리 기와집으로 지금
안국동 옛 안국병원 자리에 있었다. 마루방을 가운데 낀 방 두 개의
기역자 집으로 안방에는 은행장인 임금님의 사촌 이재완(李載完)과
대신을 역임한 김종한(金宗漢)이 부장(副長)으로서 차지하고, 곁방은
좌총무와 우총무, 그리고 행원 하나가 출납 예금 대출 전당 환 그리고
서무를 분담해 보고 있었다. 고객이 담보물로 당나귀 한 마리 몰고 오면
총무들이 화롯불 하나 복판에 놓인 마루방에 부추겨 모시고 담뱃대에
불을 붙여 드리는 서비스를 했다. 이 초기 은행에서도 이중장부를 썼는데
요즈음처럼 탈세를 위해서가 아니다. 일본계 제일은행에서 싼 이자로
빌려와 비싼 이자로 빌려주는 식의 영업이 주였는데 신식부기를 하지
않으면 제일은행에서 대출해주지 않는다 하여 신식 가로 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신식부기에는 장님인 은행장과 부장에게 결재를 맡기
위해 재래식의 세로 부기를 따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후 한성은행의 주식은 우봉(牛峰)이씨인 이완용(李完用)과 그의
서형인 이윤용(李允用), 그리고 그들의 누이 아들인 한상룡(韓相龍)이
차지했기로 우봉이씨은행으로 속칭되었고, 전주 이씨 종친 돈으로
발족하여 영친왕 이은(李垠)이 은행장이던 대한 천일은행을
전주이씨은행으로 속칭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1910년대 서울 광통교에
한성은행(조흥은행 본점자리)과 천일은행의 르네상스식 우람한 양옥이
잇달아 그 위용을 과시했었다.
3·1운동 후 민족감정과 복합하여 예금 인출 사태로 한성은행이 존폐의
위기에 몰리자 비밀리에 일본 임금이 한성은행 주식 2000주를 사들이기도
했었다. 1930년대 한국의 최고 갑부는 민대식 민규식 형제였다. 민씨
세도의 후광으로 평안감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민영휘(閔泳徽)의
아들들로 조선 한일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쌍벽이던 한성과 천일이
다시 합병하여 조선을 일으킨다는 뜻이 담긴 조흥은행이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20세기에 한국에서 탄생한 크고 작은 은행들의 이합집산의
마지막 잔존이 조흥은행이요, 한국 은행의 100년 애환이 얼룩진
은행이다. 그 조흥은행이 팔려 간판을 내리게 됐다. 역사는 허리를
잘리어 피를 흘리고 있는데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안개 속에 묻혀
갈 것이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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