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땅굴살이 21년

bindol 2022. 11. 2. 07:51

[이규태 코너] 땅굴살이 21년

조선일보
입력 2003.05.29 19:59
 
 
 
 

경상도 영천 남라현(南蘿峴)에 제비무덤이라는 예쁜 이름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의 내력을 알기 위해서는 고려 말의 난세로 소급된다. 둔촌(遁村)
이집(李集)은 신돈의 악정을 지탄했다가 일가 멸문(滅門)의 포살령이
내리자 늙은 아버지를 업고 경상도 영천의 막역한 친구 최원도(崔元道)를
찾아갔다. 이 위험인물을 사랑채 땅굴에 숨겨준 최원도는 집안
사람들에게 이를 숨기고자 걸귀 들렸다하여 한 끼에 밥 세 그릇씩 내오라
시켜 이 부자를 먹였다. 이를 맨 먼저 눈치챈 것이 그 집 계집종인
제비였다.행여 누설할까봐 불안해 하는 상전을 안심시키고자 제비는
소복하고서 상전 앞에 사약을 내려달라고 엎드렸다. 마님은 울면서
돌아앉아 독약을 내렸고 열아홉 살의 제비는 그 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다. 숨어사는 동안 둔촌의 아버지가 죽었고, 최원도는 자신이
묻히고자 잡아둔 묏자리에서 장사지내고 이 두 가문의 의리를 위해 죽은
제비무덤을 그 아래로 옮겨 오늘에 이른 것이다.

변화무상한 근대화 사회에서 변화 이전의 처신이나 신분 때문에 받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숨어 살아온 땅굴인생이 이따금 돌출해 화제가 돼
왔으며, 둔촌은 한국판 땅굴인생이었다 할 수 있다. 10여년 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40년 땅굴살이를 한 사람이
나타나 화제가 됐었다. 일본군이 괌을 점거했을 때 마군 투위드 상사가
한 섬소년의 도움으로 땅굴생활을 하다 생환하더니, 그 괌에는 밀림에서
전쟁이 끝난 지도 모르고 28년간 땅굴살이 하다가 생환한 요꼬이라는
일본병도 있었다.

21년 동안 후세인 독재정권에 쫓긴 26세의 바그다드 대학생이 자기 집에
폭 60㎝, 길이 2m의 요꼬이 토굴과 같은 크기의 구멍을 파고 21년4개월
동안 살다가 바그다드 광복과 더불어 48세의 나이로 구출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시아파의 비합법 지하조직에 들었다가 조직이 적발당하자 자기
집에 이 땅굴을 급조, 어머니가 몰래 넣어주는 식사로 목숨을 부지해온
것이다. 근육이 퇴화돼 걷지 못하고 이가 다 빠진 상태로 구출된
아멜씨는 사담(후세인 대통령)이 어딘가 숨어있다면 지금쯤 자유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독재는 온 나라 사람의
심신(心身)을 땅굴 속에 가두어 살게 하는 것이다.'(버틀란트 러셀)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