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頭像위의 신발짝

bindol 2022. 11. 7. 07:20

[이규태 코너] 頭像위의 신발짝

조선일보
입력 2003.04.14 20:18
 
 
 
 


'짚신장가 간다'는 우리 민속이 있다. 처녀가 죽으면 시집 못 간 한을
품은 손말명이 되어 완전히 죽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며 해코지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 처녀가 신었던 신발 한 짝을 한길 복판에 던져
놓고 지나다니는 총각들로 하여금 신게 해서 시집 못 간 한을
풀어주었다. 이를 짚신장가 간다 했는데 신발이 성기(性器)의 상징이요,
신발 신는 것이 성행위의 상징인 것은 동서가 다르지 않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의중에 있는 사나이나 혼약의 증거로 여자측에서 베로 만든
신발을 보내는 관습이 있으며 이스라엘 집단촌인 키부츠 결혼식에서
신랑·신부에게 신발짝을 던져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것을 보았다.
'콩쥐 팥쥐'에서 콩쥐가 잃어버린 꽃신 한 짝이 인연이 되어 감사의
후처가 되듯이 온 세계에 분포돼 있는 신데렐라 설화는 신발과 성
이미지의 구도 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첫날밤 신부가
신랑의 장화를 벗겨 주도록 돼 있는 것도 그것이다.

도둑을 맞으면 그 도둑놈 발자국을 찾아 그곳에 겨자나 고추씨를 태우면
그 도둑의 발이 아파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잡히는 것으로 알았다.
처첩(妻妾) 간의 시샘에서 상대편의 신발 코를 자르면 성력(性力)이 죽는
것으로 알고 저주(詛呪) 수단으로 선호됐었다. 곧 신발을 신은 사람과
동일화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을 있게 한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복수를 위해 장작 위에서 자고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복수를 위해
쓸개를 핥으며 기회를 노렸다. 끝내는 월왕이 항복했고 오왕은 행복한
월왕의 얼굴을 신발 신은 채 짓밟아 모욕을 주었다. 송나라 서적(徐積)은
아버지 이름에 돌석(石)자가 들어있다 해서 평생 돌을 밟지 않고 살았다.
신발로 밟는다는 행위의 모욕 이미지도 동서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슬람권 사람들은 사원에 들 때면 신발을 벗어야 하고 예배할 때도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은 속(俗) 비천(卑賤) 불명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자녀를 때릴 때 신발을 쓰면 큰일이요, 도둑이나 종, 창녀를
때릴 때 신발을 쓴다. 후세인 동상을 쓰러뜨리자 민중은 신발짝 벗어
들고 얼굴이며 가슴을 쳐댔다. 깨어진 그 두상 위에 신발짝 하나 얹어둔
보도사진이 별나게 시선을 끄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