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백년 만의 졸업장

bindol 2022. 11. 7. 07:33

[이규태 코너] 백년 만의 졸업장

조선일보
입력 2003.04.02 20:19
 
 
 
 


보스턴 동북쪽에 미국에서 가장 역사 깊다는 기숙학교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가 있다. 하버드대학 입학을 위한 예비고등학교로 미국독립
이전에 더머라는 주지사가 설립했다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兪吉濬)이 다녔던 고등학교로, 이 한국의
개화선구자를 기리고자 이 학교에서 유길준에게 명예졸업장을 주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120년 만의 졸업장이니 동서고금 가장 긴 세월의
졸업장이 아닐까 싶다. 한·미 수교 후 그 보빙사로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인 민영익(閔泳翊)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던 유길준은
관비유학생으로 미국에 남게 되었고 당시 한국 외교를 대행했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그의 학우인 동물학자 모스 박사에게 유길준을 맡겼다.
모스 박사 아래에서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갈아입고서 9개월 동안
영어를 익힌 다음 더머 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을 했다. 인격이 바로
국격(國格)임을 명심하여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모든 학문이 낯설어 자칫
꺾이지 않으려 의지의 막대 세우기에 골몰했다고 유길준은 이 유학생
시절을 회고했다.

연전에 이 더머고등학교를 찾아가 유길준이 다녔던 무렵의 교사가 예전
그대로 보존돼 있음을 보았다. 교실 한칸, 교무실 한칸 두칸으로 돼
있었으며 그 사이에 좁다란 빈방이 있어 무슨 방이냐고 물었더니
태실(笞室)이라 했다. 교칙을 범하면 이 태실로 데려와 과실을 자인시킨
다음 태동(笞童)에게 업혀(■) 교장선생이 정해진 수만큼 매질을 한다.
광복 후 과도정부 문교부장관이었던 유억겸(兪億兼)은 유길준의 아들로
일제 때 미국에 갔을 때 「담마학원(淡馬學院)」, 곧 더머 아카데미를
찾아가 아버지가 앉아 공부했던 책상을 찾아내어 한문 낙서를 보고
감개무량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 120년 전의 책상 보관한
것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어진 지 오래라는 교장선생의 말이었다.

1884년이 저물고 있던 어느날 유길준이 선생에게 열심히 질문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신문 한 장 들고 와 소리질러 달려가 보았더니,
유길준의 이념 동지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뉴스였다. 그가 짐을 꾸려 미국을 뜬 것은 그 이듬해
초였으니 118년 만의 명예졸업장이다. 졸업장이라기보다 한국개화사의
도표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李圭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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