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성난 포도

bindol 2022. 11. 18. 07:36

[이규태 코너] 성난 포도

조선일보
입력 2002.10.24 19:48
 
 
 
 


청나라 건륭제(建隆帝)의 사랑을 거부했던 서역(西域) 미인 향비(香妃)는
역사에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회교 국가인 호자국 왕비였던 이 미녀는
전리품으로 건륭제에게 바쳐졌는데 갖은 유혹을 거절하고 정절을 지켜낸
서역의 춘향이다. 그녀가 향비로 불렸던 것은 몸에서 풍기는 유혹적인
향기 때문이었다. 사막대추인 사조(沙棗)의 꽃즙(花汁)으로 목욕하고, 그
꽃즙 향고(香膏)를 온몸에 바르기 때문이었다. 사막대추가 여느 대추보다
달 듯이 사막대추 꽃은 작지만 향기는 여느 꽃보다 은근하고 매혹적이다.
양귀비가 좋아하는 여지를 대느라 국력을 소모했듯이 향비의 사조꽃 대는
데도 국력을 소비했던 것이다. 중국땅에도 사조 꽃이 피긴 하나 그
은근한 향기의 농도 때문에 가고오는 데 반 년 걸리는 서역에 가
구해다가 향비의 수요를 댔고 귀족이나 상류사회에서도 수요가 급증,
서역 사조가 판치는 바람에 토종 사조는 볼품 없는 잡목이 돼버렸다.
그리하여 '서역 대추나무' 하면 외래 작물이나 문화가 들어와 토종
작물이나 문화를 침식·고사시키는 고사성어가 되고 있다.

남미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이 맺어지면 그곳의 농산물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배와 사과 그리고 쌀은 예외품목으로 제쳐두고 포도는
한국의 비생산 시기에 시한개방하는 것 등으로 생산 농가를 보호했다고
하지만 눈가림이라 하여 분노한 농민들이 연일 일어서고 있다. 중국
마늘수입을 둔 분노가 겹친 것일 게다. 쌀 수입제한 시한도 눈앞에
다가와 벼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됨으로써ㅡ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의 대변혁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 넓은 벼논의 대체작물 물색에
여념이 없어야 할 이때에 과일 개방은 '서역 대추나무'가 아닐 수
없다. 반도를 통과하는 철도나 고속도로를 타고보면 그 연변이
포도밭으로 연속돼 있음을 볼 수 있듯이 대체작물로 포도가 부상하고
있는 판이요, 그 보관 기술이 발달하고 가공으로 소비되고 있는 판에
계절제한 수입은 생산 농가로 보아 큰 의미가 없다. 더욱이 건조한
기후와 사막지질인 칠레의 포도는 질적으로 우수하여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포도와 포도주 수출국인지라 그 포도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서역
대추나무에 치여 잡목이 된 토종 대추나무 꼴이 안 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이유 있는 성난 포도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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