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태극기 패션

bindol 2022. 11. 21. 07:37

[이규태 코너] 태극기 패션

조선일보
입력 2002.07.17 19:18
 
 
 
 


상여에 앞세워 들고 가는 공포(功布)라는 게 있다. 장방형의 삼베
깃발로, 관을 묻을 때 이로써 관을 닦기 위한 것이라는데 망인의 영혼이
마지막 깃드는 베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인지 30여년 전만 해도 아들을
낳고 싶은 부녀자들의 공포를 서로 차지하려는 장지(葬地)싸움이 신문에
이따금 보도되곤 했다. 이 공포를 얻어다 속곳을 지어 입으면 그 베에
서려있는 주력(呪力)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여긴 때문이다.
신미년에 미 극동함대가 강화도 광성포대를 공략했을 때 상륙한 선발대는
그 포대에 세워져 있던 장군기(將軍旗)인 대형 수(帥)자 기부터 노획하려
들었다. 전진에서 깃발을 빼앗으면 승리, 빼앗기면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바로 이
강화전투에서 노획한 수(帥)자 기가 전시돼 있음을 보았다. 이처럼
깃발에는 영력(靈力)이나, 실용을 떠난 정신력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데는 동서가 다르지 않다.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며 나라가 부르면 몸을 아끼지 않는 공감대
위에 나라가 영위돼 내린 것 또한 고금이 다르지 않다. 그 공감의 약속과
증명이 국기다. 한 오라기 베가 아니라 정신이기에 하늘 높이 올려
우러렀다. 그 국기가 지난 월드컵 기간 중에 애국심을 몸 가까이
당겨놓을 필요에서, 고고한 하늘에서 땅 위로 하강하여
스카프·수건·액세서리·모자·셔츠·치마·페이스페인팅 등등 일상
속으로 확산되었다. 곧 애국심이 저변화하는 플러스효과를 얻었다.
하지만 그 정신이 모멸당하는 데까지의 퇴락은 막아야 할 것이다.

당국에서 국기의 존엄을 보장해온 규정을 바꾸는 밑작업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지나치면 하지 않으니만 못함을 명심했으면 한다.
공포로 속곳 지어입어 아들 낳는 주력을 얻으려 했듯이 태극기로 팬티를
지어 입혀 애국심을 북돋우려는 부모는 없겠지만, 법망의 누수로
태극기가 휴지·신발·양말·속옷 등의 디자인이나 상표가 되어 모처럼
일상 속에 찾아든 국기정신이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하나의 국민은 그들이 소중히 하는 사물을 평등하게 나누어 누리는
이성적 공동체다. 그것이 이지러진 나라에는 비전이 없고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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