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유니폼 바꿔입기

bindol 2022. 11. 23. 05:56

[이규태 코너] 유니폼 바꿔입기

조선일보
입력 2002.06.11 18:42
 
 
 
 


월드컵 경기를 마친 다음 적대 선수끼리 유니폼을 바꿔 입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적대 감정을 완화시키는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동업자끼리 유대 강하기로 소문난 부보상(負褓商)들이 오다가다 만나면
입었던 옷을 바꿔 입고 제 갈길 간다. 곧 옷을 바꿔 입는다는 것은
친화와 신의(信義) 그리고 일심동체를 다지는 전통 의식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아버지의 옷을 맏이 둘째 셋째로 물려입었던 물림옷의 관행도
가난해서가 아니라 조손 형제간에 이해를 초월, 한마음을 가지라는 정신
의식이었다. 초생아의 배내옷을 할아버지 할머니의 속곳 빨아 지어
입혔던 것도 섬유가 빳빳한 새베를 피한다는 실용성도 있지만 신생아의
탄생으로 멀어지기 쉬운 조손간의 사이를 좁히려는 뜻이 잠재돼 있었다.
동포(同胞)를 동포(同袍)로 쓰기도 하는데 곧 같은 옷을 입는 사이라는
보다 친밀감을 돋우는 말이다.

옷은 입은 사람의 체온이 스미고 땀이 밴 그 사람의 대체물이다. 혼은
그 사람의 체온과 체취를 기억하기에 옷과 혼을 동일체로 보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사람이 죽으면 맨 먼저 그 망인이 입었던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흔듦으로써 육신을 떠나가는 혼백을 불러드리는
초혼(招魂)도 바로 그 때문이다. 처녀가 시집 못 가고 죽으면 그
아가씨가 입었던 옷을 사람이 많이 다니는 네거리에 던져두어 사나이들로
하여금 밟고 다니게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옷에 깃들어있는 영혼으로
하여금 시집 못 가고 죽은 한을 풀어주는 대리 섹스행위인 것이다.
다산한 부인의 속곳이나 바지는 많은 사람이 노리는 절도의 대상이었기로
방안에서 말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다산의 주력(呪力)이 그옷에
스며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월드컵 프랑스―세네갈 전에서 이변의 한 골을 넣은 세네갈 선수가
벗어던진 유니폼을 복판에 두고 동료선수들이 둘러서서 아프리카 고유의
발굴림춤을 추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사냥을 성공시켰을 때 그 짐승을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의례라는 해석도 있으나 사냥을 성취시킨
영력(靈力)을 그 성취시킨 옷으로부터 얻으려는 매직(魔術)춤인 것이다.
맞싸웠던 선수들이 땀이 밴 유니폼을 바꿔 입는 것도 서로의 잘 싸웠던
영력을 흡수하려는 이기적 행위가 승리감과 패배감을 중화시키는 이타적
행위로 자리매김한 것 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