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축구와 아펜젤러
한국과 잉글랜드의 사전 축구대결이 비겼을 때 한국 축구의 내력을 아는
사람들은 남다른 감회에 젖었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던
1882년 6월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가 제물포에 입항, 닻을 내렸다.
러시아의 남하에 민감했던 때인지라 견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상륙허가를 받지 못했기로 배 안에만 있기에 답답했던 선원들은 부두에
내려와 공을 찼다. 부둣가의 아이들은 신기하게 바라보았을 것이요,
끌어들여 같이 찼던 것이 한국 축구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잉글랜드 전은 한국에 축구가 들어온 지 120년 만의 재대결인 셈이다.
공식으로 유럽축구가 들어온 것은 1900 년대 초의 외국어학교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프랑스어 학교 교사 에밀 마텔이 축구를 가르쳤다는 설과
올해로 서거 100년을 맞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세우고 축구반을 둔 것이 처음이라는 설이 있다. 에밀 마텔이 한국에
초빙된 것은 1905년이요, 동소문 밖 봉국사에서 거행된 프랑스어 학교의
운동회에서 처음으로 축구시합을 한 것이 그해 5월인 데 비하여
배재학당의 축구반이 있었다는 것은 1902년이니 후자가 먼저 축구를
시작한 것이 된다.
초기 축구는 상투에 망건을 쓰고 바짓가랑이를 새끼로 묶고 일정한 사람
수도 없이 양편이 동수이기만 하면 됐다. 경기시간도 정해진 것이 없이
어느 한 편이 백기만 들면 끝났고, 득점이 없으면 반칙의 다과로 승부를
가렸다. 빈터만 있으면 축구장이 됐기에 넓이에 규격이 없었으니 하물며
골포스트가 있을 리 없어 그저 키퍼의 키만 넘기면 골인이 됐다. 그러던
중 골포스트가 처음 세워진 것이 1914년 배재학당에서였다. 골포스트라야
Y자형 소나무 두 그루 세우고 가로막대 하나 얹은 것으로 흰 칠을 했다
한다. 흰 칠을 한 데는 이상재·윤치호 선생과 의논한 것으로, 백의
민족을 상징해 은근한 민족정신을 표출한 것이요, 그 저의를 일본 관헌이
낌새 채고 축구문 철거를 통고해온 것이다. 검은 색으로 덧칠하기로 하고
철거를 면했으니 한국 축구는 이렇게 수난으로 시작됐다.
아펜젤러 서거 100주년을 맞아 추모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선교업적뿐
아니라 한국근대화 업적도 대단하려니와 때마침 월드컵이 열리고 있어
이땅에 축구의 씨앗을 뿌린 주역이라는 데 각광을 비춰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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