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쿠르드 족

bindol 2022. 11. 27. 06:25

[이규태 코너] 쿠르드 족

조선일보
입력 2002.03.26 20:27
 
 
 
 


우리에게도 친근한 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단편소설에 '미인'이라는 게
있다. 산골 마을에 한 젊은 학생이, 파리 들끓는 지저분한 마차 안의
노동자들 틈에 끼여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그 마차에 희랍조각에 나오는
것 같은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가 올라탄다. 이를 본 일동은 하나 둘씩
말을 잃고 조용해진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그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 잘 모르지만, 그것은 훨씬 이전에 이
세상에서 없어진 것 같은ㅡ」 그런 허전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고갯마루에서 이 아가씨가 내렸고, 그러자 한숨소리가 새어나왔으며,
채찍잡이는 돌아보며 "좋은 여자구먼. 저 아르메니아 아가씨는…" 하고
한숨을 쉰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와서 머물렀다는 곳이 아라라트산이요,
인류문명의 원천인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원류인 이 산이 솟아있는
이란·러시아·터키의 접경 지역이 아르메니아다. 그 아르메니아에 사는
종족이 쿠르드족으로 1000명이 탄 쿠르드족 난민선이 이탈리아 상륙을
노리고 있어 이탈리아 정부가 입국차단을 위한 비상령을 내렸다 한다.
이미 기원전 7세기부터 아르메니아 민족은
로마·페르시아·아랍·터키·몽골·러시아 등 강대국에 의해 찢기고
밟히고 할퀴기를 계속해왔는데도 종교·문자·문화, 그리고 인종의
순수성을 악착같이 지켜내린 자긍심이 강한 뼈대있는 쿠르드족이다.

아르메니아 아가씨가 별나게 미모인 것도 이 때문에 유지되고 있으며, 이
고집을 「아르메니안 어태치먼트」라고 한다. 1918년 아르메니아가
독립되자 2000년 동안 이산해 살면서 이날을 기다렸던 쿠르드족은 마치
캠핑을 마치고 떠나는 사람처럼 냄비짝 둘러메고 고국을 향해 장정에
나섰던 것이다. 2000년을 하루 이틀처럼 기다리며 정체성을 지켰으니
대단한 어태치먼트가 아닐 수 없다.

아라라트산 중턱에서 노아의 방주 파편이 발견됐다 하여 관광지가 되고
있었는데 그곳을 안내하던 쿠르드족 청년이 한 말이 생각난다. 왜 우리
같은 피압박 민족에 무관심하면서 전설 속에 나오는 배 파편에만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던ㅡ. 지금 이탈리아 연안에서 방황하고 있는
보트피플에는 이르메니아 아가씨며 쿠르드 청년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