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법율용어 考

bindol 2022. 11. 28. 16:29

[이규태 코너] 법율용어 考

조선일보
입력 2002.02.01 19:38
 
 
 
 


선조 때 서울 운종가에서 아내의 간통을 적발한 남편이 아내의 국부를
돌로 쳐 죽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다룬 관가에서는 조서를
꾸미는데 국부의 표현을 두고 고민하였다. 성(性)을 천대하는 삼강오륜이
지배하는 사회였기에 성기를 나타낼 법률용어가 없었고, 여염에서 쓰는
상스러운 말을 쓴다는 것은 선비로서 파계(破戒)가 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우회적 법률용어가 탄생하고 있다. 함양 선비
오일섭(吳一燮)이 생각해낸 것으로, 「모나지 않은 돌로(以無方之石)
차마 보지 못할 곳을 때려죽였다(打殺不忍見之處)」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성색(性色)표현을 기피하는 기색(忌色)문화권의 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 성기를 나타내는 법률용어는 「불인견지처」로 정착해
내렸던 것이다. 이처럼 법률용어도 다른 분야처럼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언어문화의 영향을 받고 변천해왔다.

삼한시대의 법률용어로 소도(蘇塗)라는 게 있는데 죄지은 사람이 도망쳐
들면 구제받는 법적 피난처를 뜻했다. 본래는 그 경계를 표시하는
솟대에서 비롯된 법률용어다. 이처럼 고대 한국에 순수 우리말
법률용어가 없지 않았는데 한문 사대시대에 한자로 수렴돼
버렸던 것이다. 한말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법전이 멀리 주나라, 가까이는 명나라
법전을 근거로 했음을 밝히고 있음으로 미루어 법률용어의 한문화를 알
수 있다. 부패관리를 처단하는 전통 형으로 솥에 삶아 죽이는 시늉을
하는 「솥찜질」이라는 공개형이 있었는데, 한문시대에 들어
부형(釜刑)으로 한문화한 것도 그 한 실례다.

갑오개혁 때 개화 법률이 정신없이 양산됐는데 이 때부터 일본 법전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고, 법률용어와 문장의 일본어화가 시작된 것이다.
더욱이 구미화(歐美化)가 겹쳐서 법률용어를 비롯, 이전에 없었거나
몰랐던 개념들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 모두가 일본을 통해서였다.

국립국어연구소가 법률용어나 문장이 부적절하거나, 잔재된 이런 오염을
지적한 실태 조사보고서를 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문과 일본 용어가
사라져가고 영어가 그 빈 자리에 밀려들 기세에 있는 언어문화 협곡에서
주체 법률용어의 확립이 시급함을 고해주는 경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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