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非理와 선비

bindol 2022. 11. 28. 16:32

[이규태 코너] 非理와 선비

조선일보
입력 2002.01.29 20:23
 
 
 
 


권력에는 불법과 비리가 세균처럼 기생하는 데 고금이 다르지 않다.
권력이 집중될수록 기생이 심하게 마련이요, 전통사회에서 이 권력형
비리를 억제해온 것은 지배 엘리트들의 마음의 그릇을 이루고 있던
선비정신이었다.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역대병요」를
편찬시켰는데, 단종 1년에야 완성되었다. 편찬 책임자인 수양대군이
편찬에 참여한 학자들에게 벼슬 한 등급씩을 올려주는 상을 내렸다.
한데 후에 사육신이 되는 하위지만이 승급 상여를 거부했다. 은혜가
임금으로부터 내린 것이라면 몰라도, 정국이 불안한데 대군이 상을
내린다는 것은 저의가 드러나 보인다는 이유에서 상을 거절하고 낙향해
버렸다. 이처럼 비리가 아닌데도 낌새가 이상한 것이 잡히면 물리쳤던
선비정신이다.

전림이 판윤으로 있었을 때 말 타고 가다가 집을 불법으로 높고 넓게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뉘 집이냐고 묻자 왕자인 회산군의 집이라
했다. 이에 『집의 칸수나 높낮이에 법도가 있는 법이니 죽기를 겁내거든
법도를 넘기지 말라 일러라. 저녁에 이 앞을 다시 지나갈 것이다』했다.
이렇게 하여 기둥을 자르고 칸수를 줄여 납작홀쭉한 왕자집이 돼버렸다.
성종 때 임금의 외척으로 승지에 있는 분이 법으로 금하고 있는 자단향
나무로 집을 지었다는 소문이 귀에 들렸다. 내시를 시켜 사실 여부를
확인한 성종은 병을 핑계하고 경복궁으로 이궁한 뒤에 외척을 처단하고
환궁했다. 대비가 살아계시므로 필시 구명을 청할 것이기에 이를 피해
이궁까지 하며 권력형 불법을 처단했던 것이다.

인조 때 허적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후궁 조씨의 종이 와서 사사로운
청탁을 했다. 부당함을 들어 물리치자 『벼슬 옮길 때 후회하지
마시오』하고 공갈을 했다. 이에 허적은 『벼슬 옮기는 것은 네가 말할
바 아니다』 하고 나졸을 시켜 묶어놓고 곤장을 쳐 죽였다. 후궁 조씨가
이 말을 듣고 주변에 일러 말을 내지 말라 하고 조심하였다.

벼슬아치로서 권력형 불법이나 비리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가려면 대단한
지조와 용기가 필요한데, 선비정신이 그것을 심어주었었다. 그것이
증발하고 없는 작금이라선지 엘리트 지배층이 줄줄이 비리에 목이
엮여나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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