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도덕 은행
중국 장사(長沙) 인근 마을에서 시작된 도덕은행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도덕은행이란 남이 불행을 당했을 때
봉사나 금품으로 돕고 이를 은행에 돈 맡기듯 저축해놓고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르는 자신의 불행에 대비, 그 저축 선행을 찾아쓰는 제도다.
무형의 봉사를 저축할 때에는 그 봉사 현장의 이장이 봉사 시간을
확인하는 증명서를 떼어 주고 이를 도덕은행에 맡기면 1시간을 5위안으로
환산 통장에 올린다. 19세기에 중국에서 오래 살았던 아더 스미스의
「중국인 성정론(長沙論)」에 이런 목격담이 적혀 있다.「말을 타고 가던
한 부인이 낙마를 하여 땅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데 이를 보고도
마부는 모른 체하고 말을 몰고 갔고 그 많은 행인이 오가는데 어느
누구도 돌보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한 사람이 부축하여 외국인이
하는 요양소에 업고 갔는데 알고 보니 환자와 10원으로 흥정하고 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보상 없이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중국인의
의식구조에 걸맞은 풀뿌리 도덕은행이랄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환난을 당한 집에 봉사와 금품으로 도움을 주고 후에
자신이 환난을 당했을 때 보상받는 관습 제도가 없지 않았다. 바로
불행을 서로 돕는다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이 향약(鄕約)에 보장돼
있었다. 율곡(栗谷)이 정했다는 해주(海州)향약의 환난상휼 조항을 보면
이렇다. 한 마을에 불이나 집을 소실하면 한 집 당 장정 한 명씩을 내어
하루 먹을 양식과 짚 세 다발 통나무 한 그루 새끼 열 발씩을 들고 가
봉사한다. 도둑을 맞으면 도둑맞은 양식이나 숟가락 밥그릇을 배분하여
채워준다. 환자가 생기면 의원을 모셔와 그 경비를 나누어 낸다. 모든
식구가 앓아 농사를 짓지 못할 때는 인력을 추렴해 농사를 지어준다.
가난으로 노처녀가 생기면 추렴으로 여의어 주고 가난으로 끼니를 못
이으면 집집마다 밥 지을 때 덤으로 지어 갖다주었다. 다른 사람이
환난을 당했을 때 보상을 해야 하나 중국의 도덕 은행처럼 봉사를 돈으로
환산하여 계상(計上)하는 등의 선의가 타산(打算)된다는 법이 없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 아름다운 도덕은행의 전통을 지방자치제도와
더불어 부활시킬수도 있는 호재인데 이웃 중국이 앞서가니 못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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