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은퇴자 협회

bindol 2022. 11. 29. 15:58

[이규태 코너] 은퇴자 협회

조선일보
입력 2002.01.18 20:21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이어' '해피 버스데이'는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고 있지만 단 한 가지 은퇴를 축하하는 '해피
리타이어먼트'는 우리나라에서 통하지 못하고 있다. 카드 파는 가게에
들어가보아도 '해피 리타이어먼트'의 카드는 살 수가 없다. 만약 그런
카드가 있어 사서 보냈다면 약올린다 해서 평생 원한을 살 것이다.
하지만 미국 카드 가게에 들어가면 은퇴를 축하하는 카드가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 인쇄된 문구를 몇 가지 옮겨보면 이렇다. 「은퇴한 나날은
행복한 나날/ 신나는 새 경치를 바라보며/ 많은 새로운 일을 하게
됐으니/ 당신은 얼마나 운이 좋은가」 「은퇴하는 마당은/ 미래를
바라보고/ 그대의 전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모험과 대결하는
마당ㅡ.」 「은퇴는 당신에게 있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오/ 새로운
친구와 만나, 기다리고 있을 기쁨을 나누기를―. 마음으로부터
축하하오.」 카드에 인쇄된 이 문구들만 보아도 서양사람에게 있어
은퇴는 제2인생의 시작이요, 못다 했던 행복찾기의 첫걸음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옛 산촌에서 아들들이 자라 농사일에서 은퇴하면 가문의 자녀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는 「내 논」의 훈장이라는 제2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논」이란 예비농부에게 땅을 떼어주고 모심는 것부터 벼베기까지
농사일을 배우게 하는 교육용 전답이다. 페스탈로치는 은퇴 후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에 정시에 출근해서 놀이터에 떨어진 돌멩이나 사금파리 등
아이들을 다치게 하는 쓰레기를 줍고 다녔다. 분실물 습득이라 의심받고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던 페스탈로치의 제2인생이다. 이처럼 은퇴자가
아름다운 제2의 인생을 택하기에는 너무 각박한 한국의 현실이다.

선진국에서는 은퇴자 아니면 취업 못하게 돼있는 일이 많아 취업의 문도
넓다. 싱가포르만 해도 포장마차는 일정 연령이 아니면 허가해주지
않는다. 일본을 여행한 사람이면 알 수 있겠지만 톨게이트 업무나 수위,
공원의 잡역 등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젊은이들이 침범하지 않고 있다.
500만명을 헤아리는 한국 은퇴자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회에서 빼앗긴
은퇴자의 영토를 회복하며, 은퇴를 제2인생의 출발로 축복받을 수 있게
하는 한국적 은퇴문화의 창조를 내걸고 대한은퇴자협회가 출범했다.
'해피 리타이어먼트'로 인식을 전환시킬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