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가을밤, 외로움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풀잎 위에 이슬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백로(白露)가 지나고 나면 철은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든다. 촉촉하고 정갈한 느낌으로 다가 오는 이슬은 가을밤의 정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존재이다. 가을밤 하늘에 밝은 달이 있다면 땅에는 촉촉하고 정갈한 이슬이 있다. 달과 이슬의 가을밤이면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는 경향이 있다. 당(唐)의 시인 두보(杜甫)도 예외는 아니었다. ◈ 달밤에 아우를 생각하다(月夜憶舍弟) 戍鼓斷人行(수고단인항) 수자리 북소리에 인적은 끊어지고 秋邊一雁聲(추변일안성) 변방의 가을에 외기러기 우는 소리 露從今夜白(노종금야백) 이슬은 오늘밤부터 하얗게 내리고 月是故鄕明(월시고향명) 이 달은 고향에서도 휘..

가을밤의 노래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일 년 사계절 중에 밤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아마도 가을일 것이다. 그러면 가을밤은 다른 철의 밤과 무엇이 다를까? 달이야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라도 뜨고 지지만, 유독 가을밤에 그 모습이 돋보이는 이유는 다른 계절에 비해 부쩍 맑은 하늘 때문이리라. 여기에 가을 특유의 이슬이 더해져서 가을밤은 그 아름다움을 형성한다. 물론 여기엔 사람들의 심리적인 측면도 많이 작용할 텐데, 예를 들면 외롭고 쓸쓸한 감정의 상승 같은 것이다.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의 눈에 보인 가을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가을밤의 노래(秋夜曲) 桂魄初生秋露微(계백초생추노미) 달은 막 떠오르고 가을 이슬 촉촉한데 輕羅已薄未更衣(경나이박미경의) 비단옷 엷어도 아직 갈아입지 않았다 銀箏夜久殷勤弄(은..

가난한 자의 가을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부쩍 차가와진 가을 바람은 문틈으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보다.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고 들어오기도 하니 말이다. 바람은 차고 낙엽은 지고, 가을 풍광은 쓸쓸하기 마련인데 여기에 가난과 외로움이 겹치면 그 쓸쓸함은 배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쌀쌀한 가을 날씨보다 차가운 것은 냉랭한 사람의 심사일 것이다. 당(唐)의 시인 맹교(孟郊)는 쓸쓸한 가을 저녁의 서글픔을 톡톡히 맛보았다. 가을 저녁 가난하게 살던 때를 술회하다(秋夕貧居述懷) 臥冷無遠夢(와냉무원몽) : 차가운 방에 누워 먼 고향 꿈도 못꾸고 聽秋酸別情(청추산별정) : 가을 소리 들으니 이별의 정이 괴로워라 高枝低枝風(고지저지풍) : 높고 낮은 가지에 바람이 일어 千葉萬葉聲(천엽만엽성) : 온갖 나뭇잎 소리 들려온..

가을의 흥취

한시이야기 ▲ 김태봉 공자(孔子)의 말 중에 ‘시에서 감흥을 일으킨다(興於詩)’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시는 시경(詩經)을 말하는 것이지만, 시경(詩經) 시 305편 가운데 160수가 민간가요임을 감안하면 이 시를 시경 외에 일반적인 시까지 포함해 생각한다 해도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고로 시인은 감흥을 잘 일으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쓴 시를 통해 감흥을 전달받곤 한다. 가을이 주는 감흥도 마찬가지이다. 감흥을 잡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던 시인의 시를 통해 그것을 전달받는 것은 커다란 기쁨일 것이다. 당(唐)의 시인 두보(杜甫)가 전달해 주는 가을의 감흥은 과연 어떠했을까 가을의 흥취(秋興) 玉凋傷楓樹林(옥로조상풍수림) 옥같은 이슬에 단풍나무 숲에 나뭇잎 시들고 巫山..

가을 산책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가을은 봄에 비해서 화사함은 떨어지지만 차분함은 확실히 앞서있다. 맑은 가을 날 한적한 시골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가을 정취에 빠져들고, 차츰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의 가을 소풍을 따라가 보면 차분한 가을 정취가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망천에서 한가하게 살면서 배수재에게 드립니다(輞川閑居贈裴秀才迪) 寒山轉蒼翠(한산전창취):차가운 가을 산이 검푸르게 변하고 秋水日潺湲(추수일잔원):가을 물은 날마다 졸졸 흐른다 倚杖柴門外(의장시문외):지팡이 짚고 사립문 밖에 나아가 臨風聽暮蟬(림풍청모선):바람 쏘이며 저문 매미소리를 듣는다 渡頭餘日(도두여낙일):나룻가에 지는 햇살은 남아있고 墟里上孤煙(허리상고연):작은 마을에..

가을날 술 한 잔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바쁘고 판에 박힌 일상에 묻혀 살다 보면 사람들은 삶의 참된 모습에 대한 의문을 도외시하기 쉽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계제를 맞곤 하는데 아마도 가을날 한적한 정취에 술을 한잔 기울이다 보면 그러할 것이다.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가을 어느 날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자연을 관조하며 삶의 참된 모습이 어떠한지를 그려내고 있다. 술을 마시며(飮酒)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 변두리에 초가집 지어 사니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 날 찾는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 없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 묻노리, 어찌 이럴 수 있는가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 마음이 욕심에서 멀어지니, 사는 곳도 구석지네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 동쪽 울타리 아래 국..

가을 산 속 친구를 찾아서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멀리 있는 가족이 그립고, 고향이 그립고, 친구가 그립다. 대부분은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그치지만, 간혹 그리운 대상을 찾아 나서는 때도 있다. 문득 생각이 나서 나선 길이라, 상대편에게 알리고 가는 일은 잘 없다. 어떻게 보면 아무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찾아온 사람이 더 반가울 수도 있다. 때로는 찾는 사람이 그 자리에 없어 만나지 못하는 때도 있다. 사람은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리움의 병은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다. 당(唐)의 시인 위응물(韋應物)도 가을날 그리운 친구를 찾아 무작정 산속으로 떠났다. 전초산 속 도사에게(寄全椒山中道士) 今朝郡齋(금조군재냉) : 오늘 아침, 관사는 차가워 忽念山中客(홀념산중객) : 문득 산중의 사람이 생각난다..

취객의 수작 그리고 재치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유구한 세월을 겪다 보면 간혹 언어가 본의에서 크게 벗어나 이미지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예 중 하나가 수작(酬酌)이라는 말일 것이다. 술을 주고받는다는 뜻의 이 말은 결코 나쁜 이미지의 말이 아니었지만 어느 시점부터인지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추파를 던진다는 의미의 나쁜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다. 아무래도 흐트러지기 쉬운 술자리에서 자주 일어나긴 하지만 맨정신에도 수작(酬酌)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술자리에서 술시중을 드는 일을 했던 기생(妓生)이라면 수작(酬酌)은 늘 맞닥뜨리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기생들이 지체 높은 손님들의 수작(酬酌)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기생이었던 이매창(李梅窓)은 수작(酬酌)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였는데 그 요체..

백양사 쌍계루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시재(詩才)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경이롭게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온전히 읊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닐 것이다. 입이 딱 벌어지도록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감탄사만 연발할 뿐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표현을 하고 싶지만 이미 할 말을 잊었다(欲辯已忘言)고 한 도연명(陶淵明)의 말이 결코 겸사(謙辭)가 아닌 것이다. 단풍이 곱게 물든 늦가을엔 어디를 가든 절경(絶景)이요 승경(勝景)이지만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나 할까. 그 중에서도 빼어난 경치가 있게 마련이니 전라남도 장성군에 소재한 백양사(白羊寺) 쌍계루(雙溪樓)의 늦가을 정경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高麗)의 시인 정몽주(鄭夢周)도 이 기막힌 절경(絶景)에 할 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쌍계루..

늦가을 산속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늦가을의 풍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아무래도 산 속일 것이다. 늦가을의 주인공은 낙엽이고, 온갖 나무들로부터 떨어져 내린 낙엽이 쌓인 곳이 산 속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무마다 고유의 빛으로 도도한 자태를 뽐내던 터였지만, 이제는 한껏 몸을 낮추어 대지에 나란히 눕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고 늦가을 산 속에 낙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늦가을 특유의 여러 풍광들이 어우러져 있지만, 그 모두가 낙엽과 절묘한 앙상블을 형성한다. 당(唐)의 시인 유종원(柳宗元)은 늦가을 새벽 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을 응시하고 그들과 교감하였다. 가을 아침 남곡으로 가며 황촌을 지나다(秋曉行南谷經荒村) 杪秋霜露重(초추상로중) : 늦가을 서리와 이슬 짙은데 晨起行幽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