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첫눈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사람이 살면서 만나는 기후 현상 중에 첫눈만큼 사람을 설레게 하는 것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늦가을 땅은 낙엽이 서리에 엉키고 사람 발에 밟히고 하여 스산하면서도 지저분한 느낌을 주고 고개를 들어 보면 나뭇잎은 모두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황량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지저분하고 스산하고 황량한 늦가을 분위기를 단박에 전혀 다른 느낌의 분위기로 바꿔 버리는 것이 바로 첫눈이다. 지저분한 낙엽으로 칙칙한 느낌이던 땅은 새하얀 눈이 쌓여 졸지에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모습으로 둔갑하고 나뭇잎 하나 달리지 않아 황량하던 나뭇가지에는 갑자기 하얀 눈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이숭인(李崇仁)은 어느 해 첫눈을 산속에서 만났다. 첫눈(新雪) 蒼茫歲暮天(창..

이별의 품격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회자정리(會者定離)요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고 했던가? 만나면 헤어지게 되어 있고 떠나가면 돌아오게 되어 있다. 사람의 일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교직(交織)이라고 해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일반 사람일지라도 이럴진대 사람과의 만남을 업으로 했던 기녀(妓女)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겪을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을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을 자주 하다 보면 만남도 헤어짐도 무덤덤해지기 쉽겠지만 간혹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고 하다. 아무리 직업적으로 오는 손님을 맞는다 하더라도 간혹은 마음에 들어 정이 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황진이(黃眞伊)는 기생이었지만 이별의 품격을 아는 낭만 가객이었다. 소세양을 보내며(奉別蘇判書世讓..

꿈속의 사랑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사랑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고통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언제나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인생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마다 이별의 사정은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이별이 좋아서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저런 부득이한 사정으로 헤어져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운 마음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깊은 정이 든 부부나 연인들 사이에 흔히 있는 상사(相思)의 정은 자칫 병이 되기도 한다. 이 상사병(相思病)에 걸리면 곧잘 꿈속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곤 한다. 조선(朝鮮)의 시인 황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사몽(相思夢)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 그리워하다 마주 보는 건 단지 꿈..

동지 팥죽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동지(冬至)는 24절기 중 22번째 절기로 한 해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동지(冬至)를 한 해의 마무리이자 또 한 해의 시작으로 간주하였다. 양력으로 12월 21일이나 22일과 겹치는 동짓날이면 집집마다 팥죽을 쑤곤 하였다. 선인들이 동짓날 팥죽을 쑨 의도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또 한 해를 시작하면서 집안의 부정한 기운을 몰아내고자 함이었다. 왜냐하면 팥죽의 붉은 빛깔에 악귀를 예방하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팥죽이 다 되면, 먼저 사당에 올려 동지 고사를 지내고, 방과 장독, 헛간 등 집안 구석구석에 두었다가, 다 식고 나면 집안 식구들이 둘러앉아 나누어 먹었다. 고려(高麗)의 시인 이색(李穡)도 예외 없이 동..

이별의 정석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사람이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별하게 되는 일을 겪곤 한다. 살아생전에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은 가슴 속에 평생 한으로 남게 마련이다. 살아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 전쟁터에 간다거나, 정치권력과 같은 불가항력적 힘에 의에 강제적으로 이별을 당하는 경우 사람들은 깊은 무력감에 빠지고 처절한 비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보통 이별의 순간에 이성을 잃기가 일쑤이고 허둥지둥 울부짖으며 그 소중한 순간을 보내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비극적인 이별의 순간에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별의 정을 나누어야만 그나마 아쉬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한(漢)의 시인 이릉(李陵)은 평생의 벗과 헤어지면서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친구에게(與蘇武詩) 攜手上河梁(휴수상하량) : 손..

농가에서의 새해 첫날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사람들이 세월이 빠름을 가장 극적으로 느끼는 시간은 아마도 묵은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 첫 날 사이의 시간일 것이다. 입으로 남은 초를 열부터 외치다 마침내 영에 이르면 이미 해가 바뀌어 버리고 말았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나이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의 여러 가지 처지에 따라서 느낌은 다르겠지만 사람들은 새해 아침이면 뭔가 새로운 결심을 하기도 하고 소망을 빌기도 한다. 시골 농가에서 새해를 맞은 당(唐)의 시인 맹호연(孟浩然)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골 농가의 정월 초하루(田家元日) 昨夜斗回北(작야두회배) : 어제 저녁 북두가 북에서 돌다 今朝歲起東(금조세기동) : 오늘 아침은 새해가 동에서 뜬다 我年已强仕(아년이강사) : 내 나이는 이미 마흔살인데 無祿尙憂..

꿈길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겨울밤은 길고 길다. 걱정거리가 많아 잠 못 드는 사람에게, 긴 밤은 통과하기 힘든 인고(忍苦)의 터널이다. 걱정거리가 어떤 것이든 다 고통스럽기 마련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간절히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 일일 것이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언제 돌아올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막연히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운 마음과, 행여나 낯선 곳에서 고생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에 대한 초조함이 합쳐져서 그야말로 잠 못 드는 밤이 되고 만다. 이런 때 가장 요긴한 것이 있으니, 바로 꿈이다. 잠이 들어야 꿈도 꾸는 법이니, 긴 밤 내내 잠 못 들다 새벽녘 ..

눈경치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겨울에 눈이 없다면,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얼마나 마음이 움츠러들까? 그리고 낙엽마저 사라진 산야는 얼마나 삭막할까? 자고 일어나서 방문을 열었을 때, 마당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포근함과 순결함과 풍성함을 느끼곤 한다. 산과 들을 하얗게 덮어버린 눈을 보면 사람들은 대자연의 장엄함에 숙연해진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눈을 보고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였던 조선(朝鮮)의 시인 김삿갓(炳淵)은 산을 뒤덮은 장엄한 눈 풍경을 보고도 특유의 해학 기질을 유감없이 발동하였다. 눈경치(雪景) 天皇崩乎人皇崩(천황붕호인황붕) 천황씨가 죽었나 인황씨가 죽었나 萬樹靑山皆被服(만수청산개피복) 나무와 청산이 모두 상복..

인생과 날씨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맑았다가도 흐려지고, 흐렸다가도 맑아지는 것이 날씨이다. 날씨의 이런 모습을 단순히 변덕이라고 폄하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인생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날씨에 청우(晴雨)가 번갈아 나타나듯이 인생에는 길횽화복(吉凶禍福)이 수시로 교차한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시습(時習)은 날씨에서 인생을 읽어냈다. 맑고 비 오고(乍晴乍雨) 乍晴還雨雨還晴(사청환우우환청) 언뜻 갰다가 다시 비가 오고 비 오다가 다시 개니 天道猶然況世情(천도유연황세정) 하늘의 도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譽我便是還毁我(예아변시환훼아) 나를 기리다가 문득 돌이켜 나를 헐뜯고 逃名却自爲求名(도명각자위구명) 공명을 피하더니 도리어 스스로 공명을 구함이라. 花開花謝春何管(화개화사춘하관) 꽃..

산골의 겨울 매화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조선(朝鮮)의 시인 신흠(申欽)은 그의 시 야언(野言)에서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라고 읊은 바 있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매화는 겨울을 대표하는 꽃으로 기품과 동시에 지조를 상징한다. 세한삼우(歲寒三友) 중 소나무와 대나무가 겨울을 견디어 낸다면 매화는 겨울을 달래고 어루만지어 아무 일 없이 지나가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매화의 은근한 향기에 사나운 겨울은 나긋나긋 봄에 자리를 양보하고, 그래서 결국은 꽃의 계절 봄이 도래하게 된다. 송(宋)의 시인 임포(林逋)는 겨울 해질 무렵 산촌에서 우연히 매화와 맞닥뜨렸다. 산원소매(山園小梅)-임포(林逋) 眾芳搖落獨暄姸(중방요락독훤연) : 온갖 꽃은 떨어져도 홀로 화사하고 고아 占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