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버드나무도 한철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겨우내 딱딱하게 굳은 모습으로 생명을 꽁꽁 숨기고 있던 초목들은 봄바람의 속삭임에 슬그머니 밖으로 생명의 낯을 드러낸다. 봄바람을 맞은 초목은 삽시간에 딱딱한 겨울 갑옷을 벗어버리고 화사하고 부드러운 비단 옷으로 갈아입는다. 생명의 느낌은 부드러움이고, 이 부드러움은 곧 봄의 촉각(觸覺)이다. 이 봄의 촉각을 가장 선명하게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버드나무이다. 까맣고 딱딱한 무채색의 나무 기둥에 불과했던 버드나무는 봄이면 백팔십도 바뀐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버드나무야말로 봄이 연 생명 잔치의 주빈(主賓)이라고 할만하다. 송(宋)의 시인 증공(曾鞏)은 이 봄의 주빈(主賓)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았..

애수의 봄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흘러간 노래 중에 애수(哀愁)의 소야곡(小夜曲)이란 것이 있다. 떠나간 옛사랑을 못잊어 괴로워하는 노래 속 주인공의 모습이 아련한데 이러한 애수(哀愁)의 감정은 역설적이게도 화사하기 그지없는 봄날에 전염병처럼 찾아오곤 한다. 아마도 봄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함께 했던 옛사랑이 그리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꽃은 봄이면 다시 피지만 떠나간 옛사랑은 다시 오지 않는 데서 애수(哀愁)는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봄의 또 다른 손님이다. 당(唐)의 시인 유운도 봄에서 애수(哀愁)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강남곡(江南曲) 汀洲採白蘋(정주채백빈) : 물가 모래섬에서 흰 개구리밥 따는데 日落江南春(일낙강남춘) : 강남의 봄 풍경 속으로 해가 저무는구나. 洞庭有歸客(동정유귀객) : 동..

사람보다 풀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흔히 5월을 일러 계절의 여왕이라 일컫는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한 마디에 오월에 대한 수많은 다른 찬사들이 묻혀버렸지만 일년 열두달 중 5월만큼 사람들로부터 진한 러브콜을 받는 달은 없을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온갖 꽃들의 화사함을 무색케 하는 연록의 향연은 싱싱한 생명 그 자체이고, 그 주인공이 바로 오월이기 때문이다. 싱싱한 생명의 발현인 오월의 풀은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이 틀림없다. 당(唐)의 시인 맹호연(孟浩然)도 오월의 풀빛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왕유와 헤어지며(留別王侍御維) 寂寂竟何待,(적적경하대),쓸쓸하게 끝내 무엇을 기다렸던가? 朝朝空自歸.(조조공자귀).아침마다 공연히 스스로 돌아온다 欲尋芳草去,(욕심방초거),꽃다운 풀 찾아 떠나려하니 惜與..

낙화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봄은 꽃과 함께 왔다가 꽃과 함께 간다. 사람들은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봄이 왔음을 실감하고, 꽃이 지는 것을 보고 봄이 지나감을 자각한다. 결국 꽃이 봄의 흐름을 알려주는 시계인 셈이다. 시계가 고장 나 돌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는 게 아니듯이, 꽃을 지지 않게 하더라도 봄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낙화(花)를 막아보려고 애쓴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도 그런 사람이었다. ◈ 지는 꽃잎을 보며(落花古調賦) 留春春不住(유춘춘부주) 봄을 잡아보지만 봄은 머물지 않고 春歸人寂寞(춘귀인적막) 봄이 가면 남은 사람만 쓸쓸해지네 厭風風不定(염풍풍부정) 바람을 짓눌러보지만 바람은 가만있지 않으니 風起花蕭索.(풍기화소..

어느 시골 나들이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 갔을 때 도리어 마음이 푸근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도 궁벽한 시골 마을이라면 궁핍하고 불편할 것으로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 어쩌다가 그곳에 가게 되어 실제로 거기서 생활을 하다 보면 생각과는 달리 나름의 풍족함과 편리함이 숨어 있었음을 발견하고는 불안했던 마음이 곧 푸근해지는 것이리라. 송(宋)의 시인 육유(陸游)는 어느 봄날 우연히 산서(山西)성의 시골 마을을 걷고 있었다. ◈ 시골 나들이(遊山西村) 莫笑農家臘酒渾(막소농가랍주혼) : 농가의 섣달에 담근 술 흐리다고 비웃지 말라 豊年留客足鷄豚(풍년유객족계돈) : 농사도 풍년이어 손님을 붙들고 닭과 돼지도 풍족하네 山重水複疑無露(산중수복의무로) : 산 첩첩 물 첩첩 길마저 없는 듯하..

청계를 가다

김태봉 세파에 휩쓸려 정신없이 살다 보면, 사람들은 문득 자신의 참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궁금해지고, 지금처럼 분주하게 사는 것이 과연 제대로 사는 것인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홀연히 낯선 곳으로 떠나 세사에 대한 잡념들을 잠시나마 잊고 세상의 이치를 관조하고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자 한다.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도 자신의 모습이 궁금해질 때면, 으레 찾는 곳이 있었다. ◈ 청계(靑溪)-왕유(王維; 699-761) 言入黃花川(언입황화천), ;황화천에 들어와 每逐靑溪水(매축청계수). ;푸른 개울물 쫓아간다 隨山將萬轉(수산장만전), ;산을 따라, 만 굽이로 나가고 趣途無百里(취도무백리). ;길을 걷는 것은 백 리를 가도 없네 聲喧亂石中(성훤난석중), ;흩어진 바위 돌에 물소리 요란하고 ..

초여름 연못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일년 중 동식물을 막론하고 생명 활동이 가장 왕성한 때를 꼽으라면 단연 초여름일 것이다. 개화(開花)와 발아(發芽)의 봄이 생명 활동의 준비 단계라면 녹음방초(陰芳草)의 초여름은 본격적인 생명활동으로의 진입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아무리 늦된 초목이라도 연록(軟綠)의 앳된 티를 벗고 제법 거뭇거뭇해진 초록의 성숙한 빛을 띠게 된다. 대부분의 초목이 꽃이 지고 결실을 시작하는 이때에 장미는 비로소 짙푸른 잎 사이로 농염한 꽃을 피우니 초여름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당(唐)의 시인 두목지(杜牧之)는 이러한 초여름의 풍광을 만끽하는 호사를 누릴 기회가 있었다. ◈ 제안군의 뒷못(齊安郡後池) 菱透浮萍綠錦池(능투부평녹금지) : 마름 부평초 ..

초여름 낮잠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여름이 되면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낮잠일 것이다. 낮이 길고 더위가 본격화되면서 사람들 몸은 아침 한나절이면 지치게 마련이다. 이 때 시원한 그늘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자는 낮잠은 어느 보약보다도 효험이 있고 설탕물만큼이나 달콤하다. 그러나 낮잠을 아무나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낮잠은 몸은 곤해도 마음이 한가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귀한 손님인 것이다. 송(宋)의 시인 양만리(楊萬里)도 낮잠이 찾아올 만한 위인이었던 모양이다. ◈ 한가히 사는 초여름 오후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2(閑居初夏午睡起2) 松陰一架半弓苔(송음일가반궁태) : 솔 그늘 아래의 시렁에 반궁 정도 이끼 끼고 偶欲看書又懶開(우욕간서우나개) : 우연히 책을 보려해도 또 펴기조차 싫어진다 戱掬淸泉..

한해살이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봄여름에 걸쳐 수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사람들은 꽃이 피어 있을 때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다가 꽃이 지고나면 아예 그 존재마저도 까맣게 잊고 만다. 한해살이풀을 포함하여 모든 식물들이 꽃을 피우는 이유는 종족 번식에 있겠지만, 사람들은 그저 꽃에 열광할 뿐, 꽃이 열매가 되고, 이 열매의 씨가 다시 풀이 되어 꽃을 피운다는 사실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젊고 화려한 날들은 얼마 되지 않고 늙고 초라한 날들이 훨씬 더 길다. 그 짧은 전성기에조차도 봐주는 사람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런 꽃과 인물은 얼마나 불행한가? 당(唐)의 시인 진자앙(陳子昻)은 봄과 여름에 피었으나 아무도 봐주지 않는 숲속의 꽃들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

소나기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하지(夏至)가 지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다. 부쩍 뜨거워진 여름 날에 기다려지는 것은 단연 소나기일 것이다. 불볕더위에 바짝 마른 대지를 적시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소나기는 예기치 못하게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산이나 들에서 갑자기 이를 만나면 낭패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반가우면서도 당혹스러운 손님인 여름 소나기를 송(宋)의 시인 화악(華岳)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 소나기(驟雨) 牛尾烏雲潑濃墨(우미오운발농묵) : 소꼬리에 검은 구름 짙은 먹물 뿌리고 牛頭風雨翻車軸(우두풍우번거축) : 소머리 머리쪽에 비바람 몰아쳐 수레바퀴 뒤집히네 怒濤頃刻卷沙灘(노도경각권사탄) : 성난 물결 잠깐 동안에 모래 여울 휩쓸고 十萬軍聲吼鳴瀑(십만군성후명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