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더위 쫓기

김태봉 교수의 한시 이야기 ▲ 김태봉 여름 무더위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계곡이나 해변을 찾아가거나 부채, 선풍기 에어컨을 총동원해도 무더위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무더위에도 예외가 아니다. 무더위가 무섭다고 무조건 피해 도망 다니기만 하면 도리어 무더위에 당하기 십상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즐기는 편을 택하는 것이 낫다. 조선(朝鮮)의 시인 기대승(奇大升)의 눈에 여름 풍광은 마냥 정답기만 하였다. 여름 풍경(夏景) 蒲席筠床隨意臥(포석균상수의와) 부들자리 대나무 침상에 누우니 虛欞踈箔度微風(허령소박도미풍) 빈 창과 성긴 발로 미풍이 불어 든다. 團圓更有生凉手(단원갱유생량수) 둥근 부채질에 다시 서늘해지니 頓覺炎蒸一夜空(돈각염증일야공) 찌는 듯한 더위가 이 ..

고요함의 미학

김태봉 교수의 한시 이야기 ▲ 김태봉 고요함의 모습은 어떠할까? 세상의 모든 존재는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 있고, 사람들의 마음도 예외가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오랜 숙원이었고, 그러한 마음의 경지를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당(唐)의 시인 상건(常建)은 시를 통해 고요함을 그려냈다. 파산사 뒤의 선원(題破山寺後禪院) 淸晨入古寺(청신입고사) 이른 새벽 옛 절에 찾아드니, 初日照高林(초일조고림) 아침 햇살이 숲 위를 비춘다. 曲逕通幽處(곡경통유처) 오솔길은 그윽한 곳으로 통하고, 禪房花木深(선방화목심) 선방둘레로는 꽃나무가 무성하다. 山光悅鳥性(산광열조성) 해 맑은 산 빛으로 새소리 즐겁고, 潭影空人心(담영공인심) 연못에 비친 그림자는..

늙음의 증세

김태봉 교수의 한시 이야기 ▲ 김태봉 한 번의 돌아봄도 없이 마냥 앞으로 가기만 하는 세월 앞에서 사람은 누구라도 늙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상에 매몰되어 살다 보면, 자신이 늙었음을 자각 못 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어느 우연한 순간에 문득 늙었음을 깨닫게 된다. 과연 늙음의 증세는 무엇인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평소 즐기던 바깥나들이가 심드렁해졌다면, 이는 나이 먹었다는 증좌가 될 수 있다. 남제(南齊)의 시인 왕적(王籍)은 나이 든 증세를 어느 계곡을 거닐다가 갑자기 느꼈다. 약야계에 들다(入若耶溪) 艅艎何汎汎 (여황하범범) 오왕의 배는 얼마나 둥실거리는지 空水共悠悠 (공수공유유) 하늘과 물은 함께 아득하여라 陰霞生遠岫 (음하생원수) 구름과 놀은 멀리 산봉우리에..

가을이 오는 느낌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무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면, 사람들은 빨리 가을이 왔으면 한다. 그렇지만 가실 줄 모르는 무더위에 가을이 올 조짐은 영 보이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 여름이 가겠거니 하다가도, 더위에 시달리다 보면 여름이 정말 가지 않을까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이럴 때 주의력이 깊은 사람은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아채곤 하는데, 무엇을 보고 그러는 것일까? 매미 소리가 부쩍 커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강정일당(姜靜一堂)도 부쩍 커진 매미 소리에서 가을이 왔음을 직감하였다. 가을 매미 소리(聽秋蟬) 萬木迎秋氣 (만목영추기) 어느덧 나무마다 가을빛인데 蟬聲亂夕陽 (선성난석양) 석양에 어지러운 매미 소리들 沈吟感物性 (침음감물성) 제철이 다하는 게 슬퍼서인가 林下獨彷徨 (..

어느 가을날에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가을날의 느낌으로 대표적인 것은 쓸쓸함이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워지고, 발밑으로 낙엽이 나뒹굴 때, 사람들이 쓸쓸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연의 풍광이 쓸쓸함을 촉발시킨다면, 쓸쓸함을 배가시키는 것은 외로움이다. 그렇지 않아도 쓸쓸한 가을날에 찾아오는 이도, 찾아갈 이도 없다면 그 쓸쓸함은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시습(時習)은 어느 가을날에 쓸쓸함을 톡톡히 맛보아야 했다. 어느 가을날에-김시습 庭際無人葉滿蹊(정제무인엽만혜) : 마당에 사람은 없고, 길엔 낙엽이 가득해 草堂秋色轉凄凄(초당추색전처처) : 초가에 가을빛이 점차 쓸쓸해져 가네 蛩如有意跳相咽(공여유의도상열) : 귀뚜라미도 뜻 있는 듯 뛰면서 서로 울고 山似多情翠又低..

추석의 달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이미 지났지만 추석의 달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일 년 중 달이 가장 밝은 날은 바로 추석이다. 그래서 한가위 보름달은 모든 달의 대표로 인식된다. 사람들이 달을 보고 떠올리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장 흔한 것은 고향과 가족이다. 어떤 이유로든 고향과 가족을 떠나 타향에 홀로 떠도는 사람들은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면 잊고 있었던 고향과 가족이 떠오르곤 한다. 이렇듯 달, 그중에서도 한가위 보름달은 향수와 그리움의 정서를 대변한다. 송(宋)의 시인 소식(蘇軾)은 추석의 보름달을 보고 무엇을 떠올렸을까? 추석의 달(仲秋月) 暮雲收盡溢淸寒(모운수진일청한) 저녁구름 걷혀 맑고 서늘한 기운 넘치는데 銀漢無聲轉玉盤(은한무성전옥반) 은하수 소리 없이 옥쟁반에 구르네..

그림 속의 학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학은 자연계에 실재하는 새임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들은 이 새를 신비스럽고 영적인 존재로 인식하였다. 은하수까지 날아오른다거나, 1600년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거나, 암수가 마주 보아 잉태한다고 여겼던 것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신선이 타고 하늘로 간 새이기도 하고, 십장생에 포함된 유일한 날짐승이기도 하고, 외진 곳에서 조용히 은거하면서 고답을 추구하는 선비를 닮았다고 하기도 하는 새가 바로 학이다. 그래서 학은 옛 그림과 문양에 무수히 등장한다. 조선(朝鮮)의 시인 이달(李達)도 어느 그림 속에서 학을 보게 되었다. 그림속의 학(畵鶴) 獨鶴望遙空(독학망요공) : 외로운 학이 먼 하늘 바라보며, 夜寒擧一足(야한거일족) : 밤이 차가운지 다리 하나를 들고 있네. 西風..

가을비 내린 날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비는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특히 가을비는 사람을 사색에 젖게 하고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 일상에 묻혀 살다가 어느 날 가을비를 만나면 문득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박은(朴誾)은 가을 어느 날 비를 만나자 친구를 떠올렸다. 빗속 친구 생각(雨中有懷擇之) 寒雨不宜菊(한우불의국) 찬비는 국화에 어울리지 않는데 小尊知近人(소준지근인) 작은 술동이는 사람 가까이할 줄 아네 閉門紅葉落(폐문옹엽락) 문을 닫으니 붉은 잎이 떨어지고 得句白頭新(득구백두신) 시구를 얻으니 흰머리가 새롭네 歡憶情親友(환억정친우) 정다운 벗 생각할 때는 즐겁지만 愁添寂寞晨(수첨적막신) 적막한 새벽 되니 시름만 더하네 何當..

가을밤 친구에게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차갑고 쓸쓸한 가을밤의 정서는 단연 그리움일 것이다. 고향, 가족, 친구와 멀리 떨어져 홀로 지내는 사람이라면 그리움에 가을밤을 쉽게 잠들 수 없을 것이다. 이럴 때 어떤 사람은 잠자리에서 뒤척이기를 반복하면서 새벽을 맞고, 또 어떤 사람은 자리를 털고 밖으로 나와 밤을 산책한다. 불면(不眠)에 대처하는 방법은 제각각이지만 바탕에 그리움이 깔려있는 것은 동일하다. 당(唐)의 시인 위응물(韋應物)도 어느 가을밤 누군가가 그리워 잠 못 들고 있었다. 가을밤에 친구에게(秋夜寄丘二十二員外) 懷君屬秋夜(회군속추야) : 때마침 가을 밤 그대가 그리워서 散步詠凉天(산보영양천) : 서늘한 하늘 아래서 시 읊으며 거닌다오 山空松子落(산공송자락) : 빈산,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幽人應..

산영루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산이 가장 아름다운 철은 언제일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을을 꼽는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다. 낙엽이 쌓이고 울긋불긋 단풍이 든 가을 산이야말로 역대로 시인 묵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가을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산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서울 북쪽 울타리 노릇을 하는 북한산도 그 중 하나로 지목되어 왔다. 조선(朝鮮)의 시인 이덕무(李德懋)는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두 명의 지인(知人)들과 삼 일간 북한산 안에 있는 열두 개의 사찰을 유람하고 돌아왔는데, 그때가 마침 가을이었다. 북한산의 가을 풍광에 매료된 그는 꿈속에 북한산이 나타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시 `산영루'는 이때의 감흥을 담은 것이다. 산영루(山映樓) 寒木深山動九秋(한목심산동구추) 차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