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가을날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봄이 꽃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단풍은 곱긴 해도 꽃처럼 소생의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단풍은 아무리 고와도 쓸쓸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이처럼 꽃의 생기가 아쉬운 가을에 피는 꽃이 있으니, 국화가 바로 그것이다. 국화는 예부터 은자(隱者)의 꽃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매화와 더불어 선비들이 애호하던 꽃이기도 하다. 조선(朝鮮)의 시인 권우(權遇)에게도 국화는 가을의 꽃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던 듯하다. 가을날(秋日) 竹分翠影侵書榻(죽분취영침서탑) 대 그림자 파랗게 책걸상에 앉고 菊送淸香滿客意(국송청향만객의) 국화는 맑은 향기를 보내 나그네 마음을 가득 채우네 落葉亦能生氣勢(낙엽역능생기세) 뜰 앞에 지는 잎 뭐가 좋은지 一庭風雨自飛飛(일정풍우자비비)..

소나무와 국화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가을의 꽃 국화는 보통 들판에서 저절로 꽃을 피우거나, 문사(文士)들의 마당이나 화분에서 꽃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 어느 경우도 은은한 향기와 함께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지만, 고고한 기품의 또 다른 상징인 소나무와 함께 있으면, 그 매력이 배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사람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산 절벽에서 소나무 옆에 피어난 국화꽃을 만난다면 가히 환상적일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인후(麟厚)는 이런 환상적 풍광을 접한 행운아였다. 절벽의 소나무와 국화(散崖松菊) 北嶺層層碧(북령층층벽) 북녘 고개 층층이 푸른 빛 짙고 東籬點點黃(동리점점황) 동쪽 울타리는 황금색 점 찍듯 緣崖雜亂植(연애잡난식) 벼랑 타고 소나무와 국화 섞여 있는데 歲晩倚風霜(세만의풍..

낙엽의 시

늦가을을 지나 초겨울에 접어들면 세상은 온통 낙엽 천지다. 산에도 들에도 길에도 집 마당에도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나뒹구는 것이 이 철이다. 이러한 낙엽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생명의 유한함과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쓸쓸함, 추억, 향수와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조선(朝鮮)의 시인 신위(申緯)는 낙엽을 보고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낙엽시(落葉詩) 天地大染局(천지대염국) 천지는 거대한 염색 가게 幻化何太遽(환화하태거) 허깨비처럼 바뀜이 어찌 저리 급할까? 丹黃點飄蘀(단황점표탁) 발갛고 노란 잎들 점점이 날리어 떨어지고 紅素吹花絮(홍소취화서) 붉고 흰 꽃들은 버들솜 되어 날리네 春秋迭代謝(춘추질대사) 봄과 가을은 번갈아 바뀌고 光景兩無處(광영양무처) 빛과 그림자..

겨울 밤

늦가을 낙엽이 여기저기 흩날리면 쓸쓸한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그러나 낙엽마저 사라져버린 겨울에는 쓸쓸함 보다 더 견디기 힘든 적막함이 밀려들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적막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집 마당이다. 나무는 잎이란 잎이 모두 떨어져 텅 비었고, 낙엽마저도 쓸려가 보이지 않는 마당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할까? 조선(朝鮮)의 시인 황경인(黃景仁)은 겨울밤에 텅 빈 마당을 보며 감회에 젖었다. 겨울 밤(冬夜) 空堂夜深冷(공당야심냉) 텅 빈 집 밤 되니 더욱더 썰렁하여 欲掃庭中霜(욕소정중상) 뜰에 내린 서리나 쓸어보려 하였다가 掃霜難掃月(소상난소월) 서리는 쓸겠는데 달빛 쓸어내기 어려워 留取伴明光(유취반명광) 그대로 밝은 빛과 어우러지게 그냥 남겨두었네 시인이 머무는 집이 텅 빈..

비단 옷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 되면, 사람들은 지난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 가는 것이 빠르게 느껴지고, 연말이 되면 부쩍 지나온 삶을 떠올리며 회한에 빠지곤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젊은 날을 헛되이 보낸 것을 가장 후회한다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당(唐)의 시인 두추랑(杜秋娘)도 젊은 시절을 헛되이 보낸 것을 후회한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비단 옷(金縷衣) 勸君莫惜金縷衣 (권군막석금루의) 그대여 비단옷을 아끼지 말고 勸君惜取少年時 (권군석취소년시) 젊은 시절을 아끼오. 花開堪折直須折 (화개감절직수절) 꽃 피어 꺾을 만할 때 꺾어야지 莫待無花空折枝 (막대무화공절지) 꽃 지고 난 뒤 빈 가지 꺾으려오? 사람들은 눈에 보이..

겨우살이

흔히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겨울철은 일이 없는 휴식 철로 인식된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직접적인 농사일이 아니라서 그렇지, 이런저런 일들이 널려 있는 것이 겨울철이다. 험난한 겨우살이를 위해서 할 일도 있고, 봄 농사에 대비해서 할 일도 있게 마련이다. 고려(高麗)의 시인 김극기(克己)는 겨울철의 일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겨울(冬) 歲事長相續(세사장상속) 해마다 일이 계속 이어지니 終年未釋勞(종년미석노) 연말이 되어도 일은 끝이 없네 板簷愁雪壓(판첨수설압) 판자로 된 처마는 눈에 눌려 걱정이고 荊戶厭風號(형호염풍호) 사립문은 바람에 삐거덕거리는 게 걸리네 霜曉伐巖斧(상효벌암부) 서리 내린 새벽엔 산비탈의 나무도 베어오고 月宵乘屋綯(월소승옥도) 달밤엔 이엉 새끼도 꼬아야 하네 佇看春事起(..

겨울 소나무

겨울이 되면 나무는 가지마다 잎이 다 떨어져 텅 비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겨울은 삭막하게 느껴진다. 푸른 나뭇잎이 사라지면 거무튀튀한 나뭇가지만 남게 되어 무채색의 겨울이 되기 십상이지만 여기에도 구세주는 있게 마련이다. 소나무가 바로 무채색 겨울의 구세주이다. 고송(孤松) 獨立倚孤松(독립의고송) 홀로 서서 소나무에 기대어서니 北風何蕭瑟(북풍하소슬) 북풍은 어찌 그렇게도 소슬한가 霜露且相侵(상로차상침) 서리와 이슬이 서로 부딪히니 爲爾憂念切(위이우념절) 너를 위한 근심스런 생각 간절하다 貞心良自苦(정심량자고) 곧은 마음은 정말로 절로 괴롭고 久有凌寒節(구유릉한절) 추위를 이기는 절개 오랫동안 있었다. 勖哉保歲暮(욱재보세모) 힘쓰게나, 세모에 몸을 보중하여 幽期庶永結(유기서영결) 들판의 만남 영원히 맺..

겨울밤

겨울밤은 길고 춥다. 물리적인 시간으로만 긴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도 겨울밤은 길고 춥다. 무슨 고민이 있어서 잠이 들지 않을 때 밤은 길 수밖에 없다. 또 외로우면 밤이 추울 수밖에 없다.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일이 모두 걱정 아닌 것이 없겠지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것만큼 걱정이 절실한 것도 드물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삼의당(三宜堂)은 무슨 이유로 긴긴 겨울밤을 잠들지 못했던 것일까? 겨울밤(冬夜) 銀漏丁東夜苦長(은루정동야고장) 밤은 길어 괴로운데 물시계 치는 소리 玉爐火煖繞殘香(옥로화난요잔향) 남은 향기 감도는 따뜻한 화로 依依曙色生窓戶(의의서색생창호) 어렴풋한 새벽빛이 창문에서 밝아오는데 鷄則悲鳴月出光(계칙비명월출광) 닭 우는소리 처량하고 달빛 흐르네..

눈의 마법

춥고 삭막한 겨울을 따뜻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는 눈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삽시간에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은 겨울 풍광의 백미가 아닐 수 없지만, 이는 단지 시각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눈이 없을 때만 해도 평범한 세속의 공간이었던 것이 눈으로 인해 졸지에 탈속의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홍간(洪侃)은 이러한 눈의 마법을 두 눈으로 목도하였다. 눈(雪) 晩來江上數峯寒(만래강상수봉한) 강 위로 날 저무니 봉우리들 차가운데 片片斜飛意思閑(편편사비의사한) 가볍게 비스듬 눈 내려 마음이 한가로워라 白髮漁翁靑蒻笠(백발어옹청약립) 흰 머리 낚시 노인 푸른 삿갓 썼는데 豈知身在畵圖間(기지신재화도간) 제 몸이 그림 사이에 있는 줄 어찌 알까? 겨울 어느 날 시인은 눈이 만들어내는 가장 황홀..

눈 내린 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는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방문과 창문을 모두 닫아 놓은 겨울밤에 방 안에서 밖을 내다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요즘 시절과는 달리 예전에는 유리창이 아니고 종이창이었으므로 더더욱 밖을 볼 수가 없었으리라. 그러면 겨울의 진객(珍客)인 눈이 밤에 내린다면, 이를 어떻게 알아챌 수 있을까? 시각으론 이왕에 불가한 것으로 되었으니, 남은 것은 청각밖에 없다. 그런데 비처럼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라서 청각으로도 될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말을 들어보면 그 답이 나온다. 밤사이 내린 눈(雪夜) 已訝衾枕冷(이아금침랭) 이불과 베개가 차가운 게 의아하다 했더니 復見窗戶明(부견창호명) 그 위에 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