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47

오래된 장소가 주는 슬픔

오래된 장소가 주는 슬픔 중앙일보 입력 2022.05.04 00:25 지면보기지면 정보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파주 심학산은 고도 194m의 야트막한 산으로, 몇 년 전만 해도 주변에 출판단지 외엔 주택 몇 채만 드문드문 있었다. 멀리 돌아 걸어도 1시간 반밖에 안 걸리는 완만한 산세의 주변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고요’였다. 이곳에 터 잡은 사람들은 이른 어둠과 정적에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 불가능은 없다’고 소문난 개발업자로 인해 마을은 한시바삐 모습을 바꿨고, 논밭이 다 주택부지로 다져지는 데는 짧은 시간으로 충분했다. 지금 이 동네는 위태로워 보인다. 산과 땅이 집 짓고 음식 팔려는 사람들로 붐벼 겨울철마다 오는 기러기 서식지는 이제 몇백㎡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이곳을 산책할 ..

마음 읽기 2022.05.10

시끄러워야 건강하다

시끄러워야 건강하다 중앙일보 입력 2022.04.14 00:33 홍성남 신부·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이번 대선의 특징은 무엇일까. 패자도 승자를 인정해 줄 만한 선거가 아니라 더티 플레이, 아이들이 본받을까 걱정될 정도로 난장판인 선거였다. 정책대결이 아닌 흠집 내기로 일관한 토론장, 지지자들 간의 멱살잡이를 연상케 하는 설전. 선거는 축제여야 하고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가는 생산적인 자리여야 하는데, 실망스럽게도 수준 낮고 품격 떨어진 모습의 연속이었다. 대결 구도 또한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성공한 사람과 기득권층에서 자란 사람의 대결 구도였고, 상대방의 성장 과정에 대해 흠을 잡는 모습은 잔인하기조차 했다. 무엇보다 가장 아쉬운 것은 토론장이 큰 비전을 제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아이..

마음 읽기 2022.04.14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중앙일보 입력 2022.04.12 00:34 업데이트 2022.04.12 01:06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다./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므로.’ 시인이며 목사인 존 던(1572∼1631)이 살던 영국,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존 던이 살던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한 사람이 숨을 멈출 때마다 교회의 종을 울리게 했다고 합니다...

마음 읽기 2022.04.12

이별의 한 방식

이별의 한 방식 중앙일보 입력 2022.03.08 00:25 지면보기지면 정보 유자효 시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서 행복했습니다. 먼저 가 계시면 따라가 모시겠습니다.” 아들의 말이 끝나자 “엄마! 엄마!” 하는 딸들의 외침이 이어졌습니다. 마치 우주인들처럼, 방호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자녀들이 플라스틱 창 너머서 울부짖는데도 어머니는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간호사가 어머니의 가슴을 두드리며 눈을 떠보라고 외쳤습니다. 간신히 고개를 든 어머니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듯하였습니다. 장모님이 위급하니 병원으로 빨리 오라는 다급한 전갈을 저 역시 진료를 받기 위해 가 있던 병원에서 받았습니다. 그날따라 빈 택시는 왜 그렇게 안 보이던지, 네거리를 이리저리 건너며 허둥대던 끝에 간신히 택시..

마음 읽기 2022.03.08

사람을 고르는 기준

사람을 고르는 기준 중앙일보 입력 2022.03.02 00:26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아직은 꽃꽂이라도 해야 그나마 꽃을 완상할 수 있는데, 남쪽에는 이미 매화가 피었다고 하니, 다가올 새봄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 꽃 고르는 기준이 바뀌었다. 은은함에서 화사함으로. 노랑·빨강 튤립을 화병 가득 꽂아 불단에 올렸다. 꽃 덕분에 어두웠던 법당이 환해졌다. 어느 분께 방에 꽃을 놓으시라 권했더니 ‘그냥 꽃 다이 늙어가겠소’ 했다던가. 이렇게 아름다운 꽃 보며 살면 더 곱게 늙어갈 텐데 말이다. 세월가면 사람 보는 눈도 바뀌나 변치 않는 기준은 ‘선한 사람’ 눈 앞의 대선, 후회 없는 선택을 동안거(겨울수행)도 끝났겠다, 한적한 절에서야 이렇듯 꽃 타령이나 하고, 붓글씨나 쓰며 시간을 보낼 ..

마음 읽기 2022.03.02

꽃 피고 지는 것도 보시게

꽃 피고 지는 것도 보시게 중앙일보 입력 2022.01.26 00:25 문태준 시인 임선기 시인이 최근 펴낸 신작 시집에 ‘음악’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시는 이러하다. “초인종을 누르면/ 늦게 도착한 이에게도// 환히 켜지는 집.// 내려오는 계단 소리//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대화// 귀 쫑긋하고 듣는 채마밭”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은 아마도 있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바깥일을 하고서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온 식구를 맞이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초인종이 울리고 집에는 등이 곧바로 켜진다. 집 전체가 꽃송이처럼 활짝 핀 듯 환하다. 반기느라 계단을 서둘러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리듬처럼 일어난다. 그리고 이 집에서는 밤이 늦도록 반가운 대화가 선율처럼 흐르고 이어진다. 이 불빛과 ..

마음 읽기 2022.01.26

불안은 우리를 크게 한다

불안은 우리를 크게 한다 중앙일보 입력 2022.01.12 00:40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불안은 인류의 속성이다. 공자는 “발전하지 못하고 퇴보하거나 타락하면 더 이상 군자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적 없는 소인들도 가만있으면 지루하고 퇴보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뭔가를 해야겠는데, 내게 이런 불안감은 독서의 가장 좋은 동력이 된다. 최은영, 김초엽, 정유정.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동시대 국내 작가이고, 지난 연말 ‘올해의 책’에 꼽히면서 한국문학의 가치를 빛냈다고 평가된 인물들이다. 연말에 몇몇 지인과 만나 각자 마음속 ‘올해의 책’이 무엇인지 이야기했는데,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거론됐을 때는 나도 읽은 책이라 안심됐던 마음이 『밝은 밤』『지구 끝의 ..

마음 읽기 2022.01.12

좋은 운을 부르려면…

좋은 운을 부르려면… 중앙일보 입력 2022.01.05 00:24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지난 연말 동지에는 악귀와 역병을 쫓는다는 팥죽을 쑤어 부처님 전에 올리고, 코로나가 소멸하기를 목탁 결이 깨어져라 기도했다. 그리고 이내 새해가 밝았다. 부디 새해에는 ‘걸림 없이 자유롭게 살게 하소서.’ 고요히 향 한 자루 사르며 기원한다. 해가 바뀔 때마다 스님들이 주로 읊는 시가 한 편 있다. 조선말 학명 선사의 시다. ‘묵은해니 새해니 구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사주·별자리 등 운세 따지는 연초 임인년에 행복 부르는 화두 하나 ‘모든 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세’ 한때는 이 시가 참 멋지게 느껴졌고, 어제와 오늘의 태양이..

마음 읽기 2022.01.07

눈보라와 무공용

눈보라와 무공용 중앙일보 입력 2021.12.29 00:32 문태준 시인 최근에 제주에도 한파가 몰아쳤다. 눈보라도 연일 쳤다. 세상이 겨울 들판 같았다. 눈보라가 칠 때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찼다. 그것은 마치 바닷물이 제방을 넘어서 흐르는 월파(越波) 같았다. 눈보라 뒤에는 또 눈보라가 따라왔다. 나는 언젠가 아득하게 너른 들판을 지나가는 눈보라를 한참을 바라보았던 때가 있었다. 눈보라에 대한 느낌은 졸시 ‘눈보라’를 통해서도 쓴 적이 있다.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 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

마음 읽기 2021.12.29

당신이 꼽은 올해의 인물은?

당신이 꼽은 올해의 인물은? 중앙일보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평소에 일기(日記)를 안 쓰더라도 한 해를 정리하는 연기(年記)는 써보는 것이 좋다. 올해의 일들을 월별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욕심을 조금 더 내자면, 월별로 사건을 나열하기보다는 몇 가지 주제를 정해서 일 년을 회상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만의 ‘올해의 인물’ ‘올해의 책’ 등을 선정해보는 것이다. 올해의 인물이 타임(TIME)지만의 전유물이 될 필요는 없다. 올해의 책이 교보문고만의 전유물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올해의 시, 올해의 색깔, 올해의 소리, 올해의 꽃, 올해의 디저트, 올해의 여행 등 주제들은 무궁무진하다. 한 해를 근사하게 장식하는 비결은 이런 주제들로 글을 써보는 일이다. 한 해를 정리하는 글쓰기 ..

마음 읽기 2021.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