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47

새털처럼 가벼운 행복 찾기

새털처럼 가벼운 행복 찾기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아침부터 눈비가 섞여 내려 더 춥게 느껴지던 어느 날, 잘 아는 보살님에게서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며 연락이 왔다. 오후에 장례식장에 가니, 핼쑥해진 모습으로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수하시고 돌아가신 거라 괜찮다고는 했지만, 창백하게 저승길 배웅하는 가족들의 슬픔이야 나이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착잡한 마음으로 염불을 마치고 돌아오며 생각했다. “인생이 뭐라고 이리 아등바등 살 일인가, 새털처럼 가볍게 자유로이 살련다 나는.” 침울하고 막막한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져 순간의 행복 음미하며 살았으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멀리 청룡암의 초라한 지붕이 보였다. 처음 이 절에 왔을 때만 해도 볼 때마다 한숨 나는 절이었는데, 이젠 ..

마음 읽기 2021.12.08

12월의 일

12월의 일 중앙일보 입력 2021.12.01 00:22 문태준 시인 열두 달 가운데 맨 끝 달인 십이월을 맞았다. 한 해가 지나감이 이렇게 빠른가 싶다. 그러나 한 해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입과 코를 가린 채 살다보니 마치 올해의 시간도, 세월도 마스크를 쓴 듯해서 언뜻 한 해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들의 얼굴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제주에도 곧 추위가 시작될 모양이다. 따뜻한 곳이지만 바람의 찬 기운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제주 어디에서나 우러러볼 수 있는 한라산 맨 꼭대기에는 흰 눈이 쌓였다. 이제 봄이 완연할 때까지 눈으로 덮인 산봉우리를 보게 될 것이다. 시인 정지용은 시 ‘백록담’에서 “해발 육천 척(呎) 위에서” 말과 소를 만난 경험을 썼다. 어미를 잃은 어린 송아지가 우는 ..

마음 읽기 2021.12.01

폭력의 개념 확장과 새로운 윤리

폭력의 개념 확장과 새로운 윤리 중앙일보 입력 2021.11.24 00:22 장강명 소설가 한국에는 문학상이 엄청 많다. 400개 가까이 된다는 추정치도 있다. 매일 누군가 문학상을 받는다는 얘기다. 어느 선배 소설가로부터 “문학상은 치질과 비슷하다”는 농담 겸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궁둥이 붙이고 오래 쓰다 보면 저절로 찾아오니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문학상의 홍수 속에서 특별한 상이 ‘오늘의 작가상’이다. 어쩌면 그런 범람 덕분에 특별해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1977년 제정된 이 문학상은 민음사에서 주최하는데, 1회 수상작은 한수산의 『부초』다. 이후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같은 작품들이 이 상을 받으며 책으로 출간되었다. 문학상 심사하며 느낀 감수성 새 시대의 윤리..

마음 읽기 2021.11.24

피로·냉소·무기력보다 무서운 섭섭함

피로·냉소·무기력보다 무서운 섭섭함 중앙일보 입력 2021.11.17 00:33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충전과 방전. 배터리에 적용되던 두 단어가 언제부터 인간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 기원은 차치하더라도 이것만큼 현대인의 삶을 잘 묘사하는 단어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단어가 왠지 인간을 배터리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 같기에 전문적인 용어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 “요즘 완전 방전 상태야” “재충전이 필요해”라고 호소하는 직원들을 위해 ‘효과적인 방전 예방법’ 같은 이름으로 사내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낡은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만 솔깃하게 들릴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주목받는 용어가 ‘번아웃(Burnout)’이다. 소진(燒盡)이라고 번역되어 사용되기도 하지..

마음 읽기 2021.11.17

자연산 가을 상품

자연산 가을 상품 중앙일보 문태준 시인 가을이 깊어갈수록 열매는 달콤하다. 그러나 나뭇가지의 끝에 매달린 어떤 열매들은 나만의 몫이 아니다. 한동안 아침에 꾸지뽕나무 아래에 가서 꾸지뽕 열매를 주웠는데, 이제 꾸지뽕 열매는 내 것만은 아니다. 며칠 전보다 훨씬 더 붉고 훨씬 더 단맛이 든 꾸지뽕 열매는 여러 마리의, 여러 종류의 새들의 소유가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새들의 것도 되었다. 나는 새들이 쪼아 먹다 반쯤 남은 꾸지뽕 열매를 줍는다. 이제 나는 새들이 먹다 남긴, 여분의 열매를 얻어먹는다. 기어 다니는 벌레가 이 꾸지뽕 열매를 먹다가 남겨 놓으면 그때에 나는 꾸지뽕 열매의 한 조각을 얻어먹는다. 꾸지뽕 열매 반쪽도 나눠 먹는다. 제주에 와 살면서 조밤나무 열매를 알게 되었다. 육지에서는 구실..

마음 읽기 2021.11.03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중앙일보 입력 2021.10.20 00:38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현재에게. 노파심에 펜을 들었네. 일곱 살 노래 신동 김유하양이 TV 프로그램에서 부른 ‘아! 옛날이여’를 들으며 눈물 흘리는 자네 모습이 염려가 되네. 물론 노래는 환상적이었네. 일곱 살 소녀가 부르는 노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지. 그렇다고 굳이 울 필요는 없었네. 일곱 살에게도 ‘옛날’이 있다는 사실이 솔직히 충격이긴 했지만, 초등학생이 유치원생에게서 세대 차이를 느끼는 세상이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네. 우리의 기억은 과거를 미화 미래가 되면 현재를 그리워할 것 현재 좋은 점을 현재에도 누려야 요새 자네는 낮잠을 자지 않더군. 시집도 읽지 않아. 일요일이면 느지막이 일어나 소설을 읽던 모습도 사라졌어. 자네..

마음 읽기 2021.10.20

오래된 인연에 감사하며

오래된 인연에 감사하며 중앙일보 입력 2021.10.13 00:24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나뭇잎 두드리는 빗소리가 그리도 차갑게 들리더니, 비 그치자 완연한 가을이다. 엊저녁에도 산책을 나갔다가 소매 끝이 싸늘하여 둘러보니, 가랑잎이 떨어져 앙상궂게 뒹굴고 있었다.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하고 길게 뻗은 창경궁 회랑 위로 맑은 달이 만물을 보듬듯 온화한 기운을 내뿜었다. 이지러진 달은 왜 쉬 차오르지 않는 것일까? 밝고 둥근 달은 왜 그리도 빨리 작아지는 것일까? 자연의 이치인가, 나의 기다림 때문인가. 한가하고 쓸쓸한 망상이 머릿속에 찾아들었다. 오늘 함께할 벗은 바로 저 달이로구나. LTE·5G 속도로 돌아가는 세상 존중과 배려가 있어야 좋은 인연 모두 다정하고 좋은 인연 맺기를 며칠 전 한 스님과..

마음 읽기 2021.10.13

‘테크네’,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테크네’,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중앙일보 입력 2021.10.12 00:25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기술을 통해 앞서기’(Vorsprung durch Technik). 15초 안팎의 TV 광고에 스치듯 지나가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한번쯤 그 차의 핸들을 잡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뱃속에서 스멀거린다. 근거 없는 오만함으로 읽히는 ‘자동차 그 자체’(Das Auto)라는 문구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굳이 문명 변천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삶을 향한 사회적·문화적·물리적 환경의 변화는 기술적 진보와 그 궤를 같이한다. 마을 이장님 댁에 기계식 전화기라도 놓여 있으면 그나마 다행, 우체국까지 수십 리 산길을 달려가 전보를 치던 것이 그리 오래전 풍경이 아니다. ‘예술..

마음 읽기 2021.10.12

가을과 공적(空寂)

가을과 공적(空寂) 중앙일보 입력 2021.10.06 00:36 문태준 시인 어제 새벽에는 얇은 빛으로 떠 있는 달을 보았다. 음력 29일이었으니 아마도 가장 작은 달이었을 것이다. 그 달을 바라보니 반딧불이 불빛이 생각났다. 파란빛이 점멸하는 반딧불이가 마치 하늘에 날고 있는 듯했다.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1912년에 태어난 백석 시인은 자신의 등단작인 시 ‘정주성’에서 그 반딧불이를 보고선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라고 썼다. 훨씬 서늘해진 새벽 공기 속에 서서 새벽녘의 달을 보고 있으니 이젠 정말이지 가을이구나 싶었다. 요즘은 아침에 틈이 나면 꾸지뽕나무 아래로 간다. 집 근처에 커다란 꾸지뽕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요즘은 그 열매가 빨갛게 잘 익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때여서 그..

마음 읽기 2021.10.06

시일야 ‘방송’ 대곡

시일야 ‘방송’ 대곡 중앙일보 지면보기지면 정보 유자효 시인 “나이 쉰이 되어도/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어머니, 아버지//아들을 기다리며/서성이는 깊은 밤//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부드러운 달빛의 손길/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아, 추석이구나” 졸시 ‘추석’입니다. 추석은 제 마음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뵙는 날입니다. 아들 내외와 손자까지 함께 절을 올리며 부모님의 모습이 이어져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선친은 “방송국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고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친의 음성이 좋다고 했지요. 선친의 꿈과는 무관하지만 저는 방송기자를 했고 아들·며느리도 방송계에서 일하고 있으니 방송 가족이 된 셈입니다. 일곱 살짜리 ..

마음 읽기 2021.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