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138

‘나라 절반이 역적이 돼 버렸나이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5. 1728년 이인좌의 난과 도래한 노론 천하 경기도 안성에 있는 낙원역사공원에는 안성 곳곳에서 모아온 공덕비들이 서 있다. 1728년 남인과 급진 소론의 반란인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조선국 사로도순무사 오공 안성 토적 송공비’도 있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의 정통성에 반기를 들고 노론 장기 집권을 타도하려던 반란이었다. 영조와 정조 정권은 이 난 평정을 기념하는 비석을 곳곳에 세웠다./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7.14 03:00 전국에 흩어져 있는 토역(討逆) 기념비 경기도 안성 낙원동에 있는 공원 이름은 안성낙원역사공원이다. 이곳에는 안성 도처에서 가져온 각종 공덕비가 모여 있다. 공원 한 켠 관리실 옆에는 부러진 팔을 시멘트로 보수한 부처님이 앉아 있는데, 그 옆에는 큼직한 비석..

“다섯 냥에 이 몸을 노비로 팔겠나이다” - 1756년 양민 안낭이 [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7. 스스로 노비를 택한 노비 계약 자매문기(自賣文記) 1756년 안낭이(安娘伊)라는 양민 여자가 다섯 냥에 자기를 조세희라는 사람에게 노비로 팔겠다는 '자매문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7.28 03:00 지난주 ‘땅의 역사 266. 안동별궁에서 벌어진 오만 가지 일들’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1624년 인조가 국가 보유 기와와 목재로 정명공주 저택을 신축하려 하자 사간원에서 이리 비판했다. “재목과 기와는 자식을 팔고 지어미를 잡혀(賣子貼婦·매자첩부) 고혈(膏血)을 짜낸 끝에 나온 것이다.”(1624년 6월 9일 ‘인조실록’)’ ‘자식을 팔고 아내를 저당 잡혔다(賣子貼婦·매자첩부).’ 전쟁 포로도 아니고 납치해온 이웃마을 개똥이도 아닌, 자기..

“가짜 양반 엄택주를 영원히 노비로 삼으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8. 조선 노비 엄택주의 파란만장한 인생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8.04 03:00 1457년 10월 21일 강원도 영월에 유폐됐던 조선 6대 임금 단종이 죽었다. 영월 말단 관리 엄흥도는 서강(西江) 물가에 방치된 그 시신을 수습해 자기 선산 언덕에 묻었다. 1698년 숙종 때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왕위가 복위되고 1758년 영조 때 엄흥도는 사육신을 모신 영월 창절서원에 배향됐다. 단종이 묻힌 언덕은 장릉(莊陵)으로 조성됐다. 이보다 3년 전인 1755년 엄흥도 후손인 전직 현감 엄택주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1698년 11월 6일 ‘숙종실록’, 1755년 3월 12일, 1758년 10월 4일 ‘영조실록’) 노비 신분을 세탁해 현감까지 오른 뒤 흑산도로 유배됐다가 ..

“미국 회사에 운산금광을 주십시오”… 美선교사 알렌, 고종에 요청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9. 황금의 나라 조선① 호러스 알렌과 운산금광 400년 동안 조선 산하에 묻혀 있던 금은보화가 19세기 말 제국주의에 의해 털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사진은 1930년대 일본 자본이 개발한 강원도 정선 천포금광. 지금은 화암동굴 관광지로 변했다./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8.11 03:00 모든 게 연결된 사람들 1884년 9월 14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청나라 상하이에서 제물포행 배에 올랐다. 조선을 기독교 왕국으로 만들겠다는 장대한 꿈도 함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알렌은 그달 20일 제물포에 닿았다. 석 달 뒤 제물포에서 50마일 떨어진 한성에서 젊은 노론 개혁파가 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이다. 이때 거의 죽을 뻔했던 ..

이방인의 엘도라도에서 조선 광부는 독립만세를 외쳤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0. 황금의 나라 조선②테일러 부부와 직산금광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는 이곳 직산금광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이 서 있다. 금광 공장은 탑 뒤편 공장건물 부지에 있었다. 미국 금광업자 앨버트 테일러는 직산금광을 개발하면서 1919년 3.1만세운동을 보도하는 기자 역할도 수행했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8.18 03:00 1896년 4월 고종이 미국인 호러스 알렌을 통해 미국 기업에 운산금광 채굴권을 넘긴 이래 조선 땅에 묻힌 각종 광물 이권은 서구 열강으로 넘어갔다. 고종 정부가 최종적으로 받은 금액은 1만2500달러였고 1939년 미국 회사가 운산에서 철수할 때까지 40년 동안 거둬들인 순익은 1000배가 넘는 1500만 달러였다. 19..

“무장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국을 세운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1. 총을 든 선비 박상진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355번지는 1910년대 무장투쟁 조직 대한광복회를 지휘한 박상진 의사 생가다. 도로명 주소는 울산광역시 북구 ‘박상진길23’이다. 어릴 적 울산을 떠났던 증손자 박중훈(67)은 지금 그 생가를 지키며 증조 박상진을 기리며 산다. 대청마루 뒤쪽에 박상진 초상과 그가 남긴 옥중 절명시가 걸려 있다./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8.25 03:00 * 유튜브 https://youtu.be/tTYyPIBYlr8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경주 세금 마차 강도사건 1915년 12월 26일 일요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받아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쾌재를 부른 사람도 있었고 충격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기독교 성탄..

[박종인의 땅의 歷史] 명나라 옛 달력 앞에서 송시열은 절을 하고 눈물을 닦았다

272. 광기의 사대(事大)-송시열의 달력과 정조의 허리띠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9.08 03:00 * 유튜브 https://youtu.be/CvrMwXxBHCE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으로 통칭되는 역대 대륙 왕조 주변국은 그 왕조와 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생존을 유지했다. 중국 왕조는 그 대가로 주변국 통치자를 그 영역 제후(諸侯)로 책봉해 큰 무력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사대(事大) 외교라 한다. 전국 팔도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대부 묘비명은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시작한다. ‘명나라 속국 조선’이라는 뜻이다. 조선만이 아니었다. ‘유당신라(有唐新羅·924년 영월 흥녕사징효대사탑비)’라 기록한 통일신라 때 비석도 있다. ‘유송고려(有宋高麗·1021년 개성 현화사비명..

대원군도 추사도 한바탕 꿈이었더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3. 서울 봉원사에 숨어 있는 근대사의 비밀들 서울 봉원사 대방(大房)에는 추사 김정희와 그 청나라 스승 옹방강의 글씨가 걸려 있다. 처음부터 이 절에 있었던 작품이 아니다. 대방은 흥선대원군 이하응 별장인 염리동 아소당을 이건해 만든 건물이다. 대원군 스승이 김정희였고, 그래서 아소당에 있던 작품들도 함께 절로 이사를 왔다. 대원군이 선친 묘를 이장하고 철거한 충남 예산 가야사 동종도 봉원사에 있다. 구한말 개화파 승려 이동인도 봉원사에 주석하며 갑신정변 주역들을 길러냈다. 근대사가 응축된 절, 봉원사다./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9.15 03:00 * 유튜브 https://youtu.be/y3VSjjFix64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울 신촌 안산에 있는 봉원사 대웅전 현판..

정말 추사는 名筆 이광사 현판을 떼버리라고 했을까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4. 봉원사에 숨은 비밀② 명필 원교와 추사에 얽힌 왜곡된 전설 전남 해남에 있는 대흥사에도 대웅전 현판인 ‘대웅보전’(사진)은 원교 이광사가 썼고 ‘무량수각’ 현판 글씨는 김정희가 썼다. 서울 봉원사에 가면 두 명필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글씨를 볼 수 있다. 대웅전 현판은 이광사, 대방(大房)에 있는 현판 두 개는 김정희 글씨다. 세간에서는 제주 유배길에서 대흥사에 들른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이광사 글씨를 깎아내리며 떼라고 했다가 유배 후 성숙해진 마음으로 그 글씨를 다시 걸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혀 근거가 없다. /김영근 기자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9.29 03:00 * 유튜브 https://youtu.be/mfSJ4RhAuL8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박종인의 땅의 歷史]그리하여 한글이 萬民의 글자가 되었다

275.훈민정음이 모든 이의 문자, 한글이 되기까지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한글박물관 입구. 1446년 음력 9월 29일 ‘세종실록’에 실린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어제(御製)의 언해본이다. 지식인층 외면 속에 훈민정음은 민간에는 급속도로 전파됐고, 19세기 말 조선을 찾은 청나라 학자들 눈에는 ‘당 태종이 군자의 나라라 한 말이 거짓이 아닐 정도로’ 모든 이들이 책을 읽는 나라가 됐다. 훈민정음은 근대 한글로 재탄생해 조선과 대한민국을 각성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됐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10.06 03:00 * 유튜브 https://youtu.be/Lryl1tjSx0k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446년 음력 9월 29일 예조판서 정인지가 이리 선언하였다. ‘훈민정음은 지혜로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