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92

미 대통령이 보낸 쿠싱, 4만 달러로 청 관리들 회유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8〉 중국 화가가 제자의 진료를 지도하는 파커의 모습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19세기 30년대 중국은 아편천국이었다. 광둥(廣東)이 특히 심했다. 열 명 중 네 명이 아편 중독자였다. 고관은 물론, 상인, 군인, 승려, 부녀자 할 것 없이 아편에 취했다. 아편 구입하기 위해 사창가로 출근하는 젊은 며느리가 있는가 하면, 도둑질에 입문한 교사도 부지기수였다. 청나라 정부도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1821년부터 35년까지 40여 차례 아편무역 금지령을 내렸다. 법은 권위를 잃은 지 오래였다. 매년 5000상자였던 아편무역이 200파운드짜리 7만 상자로 늘어났다. 은 1000만 냥이 해마다 영국으로 유출됐다. 1844년 6월 중순 미·청 회담 개시 미, 영국과..

“화치귀신은 예절 바르고 겸손, 불미스런 일 안 일으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7〉 신생국 미국은 노동력이 부족했다. 철도 부설에 투입할 중국 노동자들의 이민을 묵인했다. [사진 김명호] 중국은 이웃 나라와 교류만 있었지 외교는 없었다. 영국의 함포에 놀라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조약에 서명하면서 현대적 의미의 외교가 시작됐다. 중국은 항상 열세였다. 100년간 열강들에게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다. 국력의 차이가 크다 보니 완전 평등은 불가능했지만, 열강 중 비교적 손해를 적게 입힌 나라가 미국이었다. 첫 단추가 나쁘지 않았다. 1784년 8월 미 상선 첫 중국 입항 중 상인들 낯선 선원·물품에 호감 반세기 넘는 미국인 우대 시발점 당대 중 지식인들 미 사정에 깜깜 “미국 4년에 한 번씩 큰 두목 선출” ‘중국황후호’ 6개월 항해 후 광저..

룽윈 “소련에 등 떠밀리면 안 돼” 중공군 6·25 참전 반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6〉 1956년 봄, 상하이에서 열린 사회주의 개조 승리를 기념하는 군중대회. [사진 김명호] 1950년 1월 18일 새벽, 전 윈난왕 룽윈(龍雲·용운)이 베이징에 첫발을 디뎠다. 정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마련한, 일본 점령 시절 만철(滿鐵) 총재가 살던 대저택에서 베이징 생활을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시작으로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중공은 민주인사나 전 국민당 요원에 대한 원칙이 있었다. 안락한 생활은 보장하되 권력은 근처에도 못 오게 했다. 룽의 직책은 중공인민정부위원 겸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이었다. 명예직이었지만 룽은 개의치 않았다. 기관 사무국은 비서, 경호원, 운전기사, 요리사, 정원사 등을 파견했다.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월급..

신중국 선포한 마오쩌둥, 룽윈에게 ‘속 빈 강정’ 자리 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5〉 1954년 동북군구가 배포한 50군의 북한철도 복구작업 사진. 합성 흔적이 역력하다. [사진 김명호] 1945년 8월 중순, 중국의 항일전쟁이 승리로 끝났다. 8년간 전쟁을 지휘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중앙집권제의 신봉자였다. 전쟁 기간 중공과의 연합은 어쩔 수 없었지만, 승리가 임박하자 섬멸에 골몰했다. 중공도 매한가지였다. 겉으로는 민주와 평화를 부르짖으며, 뒤로는 내전을 준비했다. 조력자 물색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윈난(雲南)성 주석 룽윈(龍雲·용운)에게 접근했다. 룽윈 연구자의 구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윈난성 주석 룽윈은 국민정부에 편입된 여타 군벌과 달랐다. 중공이 군침을 흘릴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중앙의 지원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장제스, 룽윈·저우언라이 만나자 중공과 내통 의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4〉 국민당이 내전에서 패하자 시놀트는 귀국했다. 하원 청문회에 출석 해 국민당을 두둔했다. [사진 김명호] 충칭(重慶)의 군사참의원 의장 관저는 감시가 철통 같았다. 의장 룽윈(龍雲·용운)은 229일간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10여 년 후, 베이징의 정치협상회의 간담회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매일 신문과 책에 매달렸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애독하며 역대 정치의 득실을 살펴봤다. 정견은 발표할 기회가 있어도 자제했다. 특무들의 감시에 넌더리가 나고 자유가 그리웠다. 하루는 쿤밍(昆明)에 주둔하던 미군 지휘관이 찾아왔다. 룽, 충칭서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 홍콩 정착 원했지만 장이 거절 저우, 룽에게 장과의 결별 권유 “장 이 타이완에 보낸다” 소문 내 룽,..

룽윈의 윈난군, 장제스 그물망 벗어나 중공에 투항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3〉 충칭의 룽윈(오른쪽)과 장제스. [사진 김명호]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치밀했다. 윈난(雲南)왕 룽윈(龍雲·용운)을 끌어내리기 위해 룽의 직계 60군과 93군을 월남으로 보냈다. 명분은 항복한 일본군의 무장해제였다. 장제스의 특명을 받은 쿤밍(昆明 ) 방위사령관 두위밍(杜聿明·두율명)은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룽의 사령부를 공격했다. 외부와 통신이 두절된 룽은 월남에 있는 병력을 회군시킬 방법이 없었다. 3일 만에 백기를 들고 충칭(重慶)으로 갔다. 룽윈이 쿤밍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남 장징궈(蔣經國·장경국)를 불렀다. “직접 공항에 가서 정중히 영접해라. 관저에 성대한 환영연도 준비해라.” 장, 룽의 직계 60·93군 ..

룽윈 “장제스에 복종했는데, 미군과 이간질 상상 못 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2〉 난징 탈출 후 홍콩에 머무르던 룽윈(앞줄 왼쪽 둘째)은 대륙으로 돌아갔다. 1954년 5월, 정치협상회의 좌담회를 마친 룽윈. [사진 김명호] 일본 투항 후,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중공과 선을 그었다. 연합군 중국전구사령관 자격으로 중공에 전문을 보냈다. “일본군 무장해제에 관여하지 마라.” 중공은 발끈했다. 8로군 사령관 주더(朱德·주덕)가 충칭(重慶)의 중앙정부에 보내는 서신을 당 기관지(新華日報)에 공개했다. “다시는 중앙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 국제사회가 진동했다. “중국에 내전이 임박했다.” 장, 항일전 승리 후 중공과 선 그어 “룽, 국·공 회담 참석” 미 제안 거절 중앙군, 장 명령 따라 윈난군 공격 룽,우화산에 피신했다가 충칭으로 미 대..

장제스, 룽윈의 윈난 군·정 권력 박탈 위해 비밀공작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1〉 항일전쟁 기간 공군기지 건설에 동원된 윈난의 소수민족. [사진 김명호] 1959년 12월 4일, 중국최고인민법원이 특사 명단을 발표했다. 10년째 수감 중인 전 쿤밍 방위사령관 두위밍(杜聿明·두율명)도 전범수용소에서 풀려났다. 1년 후, 미궁투성이였던 룽윈(龍雲·용운)의 몰락 과정을 털어놨다. 두는 룽을 윈난왕(雲南王) 자리에서 끌어내린 ‘우화산(五華山)사건’의 장본인이었다. “룽 무장 해제시킨 후 데려오라” 장, 쿤밍 방위사령관에게 명령 위기 직감한 룽, 협력자들 찾아 윈난에 온 반장제스 인사들 보호 충칭 정부의 추방 지시도 묵살 왕징웨이, 일본과 평화협상 나서 왕징웨이를 마중 나온 룽윈(왼쪽 셋째)과 허잉친(오른쪽 둘째). 1938년 12월 8일, 쿤밍..

장제스, 국·공합작 항일전 승리 후 일등공신 룽윈 제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0〉 항일전쟁 시절, 쿤밍의 야외행사 개막식장에 입장하는 룽윈(중앙). [사진 김명호] 1928년 윈난(雲南)을 통일한 룽윈(龍雲·용운)은 ‘신윈난건설’에 착수했다. 말로만 하지 않고 행동에 옮겼다. 골칫거리였던 치안 문제부터 손을 봤다. 장남의 구술을 소개한다. “원인은 탕지야요(唐繼堯·당계요)가 집권 초기에 채택한 초안(招安)제도였다. 탕은 투항한 토비들로 초안군을 편성했다. 초안군은 군복만 걸쳤을 뿐, 토비와 별 차이 없었다. 부친은 초안제도를 없애버렸다. 각 현에 자위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자위대는 훈련이 필요 없었다. 윈난인들은 집집마다 총 몇 자루 없는 집이 없었다. 박격포를 갖춘 집안도 있었다. 부부싸움 하다 총격전 벌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자위..

윈난 실권 쥔 룽윈, 장제스 중앙정부와 ‘줄타기 정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9〉 룽윈은 장제스의 항일을 적극 지지했다. 2000여 개의 사원에 야전병원을 설치했다. [사진 김명호] 1926년 7월 1일 광저우(廣州), 국·공합작의 옥동자 국민혁명군(북벌군)이 출정 깃발을 올렸다. 온 중국이 국민혁명(중공은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윈난(雲南)의 통치자 탕지야오(唐繼堯·당계요)는 북벌군의 타도 대상인 북양군벌 편에 섰다. 국가주의를 표방하며 반공과 적색분자 토벌을 제창했다. 군 지휘관들의 불만이 비등했다. “불필요한 전쟁에 무력을 남용한다. 14년간 군림하다 보니 사람이 퇴화했다.” 룽, 정변 일으켜 탕지야오 타도 동지 후눠위·장루지 세력도 제거 프랑스가 내정 간섭 못하게 경계 국민정부 윈난성 주석에 취임 후 장과 18년간 협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