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92

전쟁 출동 명령 받은 펑위샹, 군사 돌려 수도 베이징 점령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8〉 임시집정에 취임한 북양정부 원로 돤치루이. 1924년 11월 24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군벌(軍閥)이라는 명사는 신당서(新唐書)에 처음 등장한다. 전공(戰功)이 혁혁한 집단이나 집안을 지칭했다. 근대에 들어와 폄사(貶辭)로 변질됐다. 시작은 중국공산당의 초석을 놓은 천두슈(陳獨秀·진독수)였다. 1918년 말, “지식이 전무하고, 국가에 대한 공이나 능력도 없는, 마적이나 다름없는 군벌들이 정치에 관여해 국법을 파괴한다”며 북양정부를 맹공했다. 개량주의자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도 유럽여행 중 이런 말을 남겼다. “군벌통치는 약육강식의 산물이다. 자멸할 날이 멀지 않았다.” 장쭤린, 2차 즈펑전쟁 이겼지만 통일 눈앞에 두고 펑위샹이 찬물 톈진서 만나 ..

장쭤린, 군벌 부패에 불만 품은 즈파 지휘관 펑위샹 회유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7〉 완(晥)파 영수 돤치루이(오른쪽 둘째)는 북양군벌 시조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직계였다. 독일에서 포병 교육받는 돤치루이. [사진 김명호] 평소 쑨원(孫文·손문),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생각이나 행동은 제각각이었다. 세 사람이 동맹을 결성한 이유는 즈(直)파 타도 외엔 없었다. 동맹을 주도한 펑(奉)파 수령 장쭤린은 즈파 분열도 시도했다. 합작에 응할 사람을 물색했다. 즈파 지휘관들의 동정을 살폈다. 육군검열사와 서북변방군 사령관을 겸한, 전 허난(河南)성 독군(督軍) 펑위샹(馮玉祥·푸옥상)을 주목했다. 극빈가정 출신 노력파 펑위샹 즈펑전쟁 공신 우페이푸와 대립 한직으로 밀리고 지원도 못받아 장쭤린, 펑위샹 부인 세상 떠나자 병..

쑨원 “도적 두목부터 잡듯 군벌 타도는 즈파 제거로 시작”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6〉 2차 즈펑전쟁 막바지 톈진에 모인 펑파와 완파 지휘관. 왼쪽 둘째부터 펑위샹, 장쭤린, 돤치루이, 루융샹, 장쭤린의 참모장 양위팅(楊宇霆). 펑위샹은 즈파였지만 베이징에 진입해 정변을 일으키고 총통 차오쿤을 연금시켰다. [사진 김명호] 1922년 6월 즈펑(直奉)전쟁에서 승리한 즈파는 새 판을 짰다. 정통성을 회복하겠다며 5년간 열리지 않았던 국회를 소집했다. 의원들은 고분고분했다. 투표로 총통 쉬스창(徐世昌·서세창)의 옷을 벗겼다. 6년 전 완(晥)파 군벌 영수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에게 밀려났던 전 총통 리위안훙(黎元洪·여원홍)을 복직시켰다. 즈펑전쟁서 이긴 즈파 영수 차오쿤 5년 만에 국회 열어 새 판짜기 나서 절치부심한 장쭤린은 완파와 연합 차오쿤..

왕융장 “동3성은 천혜의 보고, 땅속에 없는 게 없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5〉 일본 관동군에게 점령당한 후, 간판마저 없어진 동3성병공창. 1931년 가을 펑톈. [사진 김명호] 1922년 4월 28일, 즈펑(直奉)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즈파의 승리였다. 즈파 영수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의 기세는 구름을 뚫고도 남았다. 의기양양하게 펑파 사령부 소재지를 시찰했다. 톈진(天津)에 도착하자 진풍경이 벌어졌다. 저명인사와 외교사절이 줄을 이었다. 전 동3성 총독 자오얼쉰(趙爾巽·조이손)이 충고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예사 인물이 아니다. 최정예 사단은 이번 전쟁에 내보내지 않았다.” 즈군 맹공 뚫고 동3성 온 장쭤린 장쉐량에게 정전협상 임무 맡겨 미·영, 내전 불간섭 내세워 거절 미국인 목사들이 나..

장쭤린 “땅은 육신이나 마찬가지, 조금도 줄 수 없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4〉 동북병공창이 만든 대포 성능 시험장에 참석한 왕융장(대포 왼쪽 첫째)과 한린춘(왕융장 옆). [사진 김명호] 1916년 6월, 북양정부의 비조(鼻祖)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세상을 떠났다. 중국 천지가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42개의 군벌집단이 깃발을 날렸다. 1928년 겨울,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전국을 통일하기까지, 군인정치가와 군인이 내세운 13명이 번갈아 베이징에 군림했다. 장제스의 마지막 상대는 평소 무시하던 펑톈(奉天)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었다. 작은 군벌서 수십만 군대 수장 돼 소련·일본의 압력 속 영토 방어 “동북 출신 군사 전문가 물색하라” 최측근 왕융장에게 은밀히 지시 국제 무기시장 밝은 한린춘 통해 ..

장쭤린 “마적 출신 군관 민폐 극심” 왕융장에게 개혁 특명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3〉 동북대학교 개교식에 참석한 왕융장(앞줄 오른쪽 다섯째). 오른쪽 넷째는 장쉐량(張學良). 교장은 왕융장이 겸했다. 1923년 4월 26일, 펑톈(지금의 선양). [사진 김명호] 청(淸)나라 말기, 다롄(大連)교외 진저우(金州)에 왕커쳰(王克謙·왕극겸)이라는 회계원이 있었다. 지주들 장부정리 해주며 양식 걱정은 안 했다. 부자들도 왕을 회계쟁이라며 막 대하지 않았다. 거드름 피우는 부잣집 부인네들은 더했다. 허드렛일 다니는 왕의 부인만 보면 기가 죽었다. 이유가 있었다. 아들 융장(永江·영강)과 융차오(永潮·영조)가 17세 때 지방고시에 합격한 수재(秀才)였다. “서진(西晉)의 소년천재 육기(陸機)와 육운(陸雲)을 능가한다”는 소문이 다롄까지 자자할 정도였다..

장쭤린 경계한 위안스카이, 펑더린 이용해 견제 시도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2〉 마적에서 군인으로, 군인에서 다시 경찰로 태어난 왕년의 마적들. 1918년 펑톈(지금의 선양). [사진 김명호]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마적에서 출발했다. 지방군대의 지휘관이 되기까지 온갖 모욕을 삼키고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동3성에는 마적 두목에서 정규군 지휘관으로 변신한, 장쭤린 같은 인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1907년 봄, 8명이 삼국지의 도원결의를 흉내 냈다. 출신은 마부, 공사판 노동자, 두부장수, 목동, 벽돌공장 인부, 수의사 등 다양했지만, 본업 걷어치우고 마적으로 성공한 당대의 괴짜들이었다. 나이순으로 형 동생을 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석이라면 모를까 형제 서열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 셋째 펑더린(馮德麟·풍덕린)과 일곱째 장쭤..

군비 확장, 교육 투자, 경제 성장에 물불 안 가린 장쭤린

군비 확장, 교육 투자, 경제 성장에 물불 안 가린 장쭤린 [중앙선데이] 입력 2020.11.14 00:21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1〉 북양정부 4대 총통 쉬스창(徐世昌, 한가운데)과 내각 성원, 각 성의 독군(督軍)들과 함께 프랑스 군사대표단 환영식에 참석한 장쭤린(앞줄 왼쪽 다섯째). 1918년 10월 27일, 베이징 중난하이. [사진 김명호] 중화민국은 북양정부와 국민정부의 통칭이다. 북양정부는 1912년에 집권한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이듬해 10월 6일 초대 대총통에 선출되면서 출범한 청나라 멸망 후 최초의 합법적인 중국정부였다. 주축은 위안스카이가 배출한 북양군벌이었다. 북양정부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북벌군에게 멸망하기까지 4단계를 거쳤다. 북양정부의 마지막 집..

“백이 숙제 흉내나 내겠다” 자오얼쉰, 중화민국 요직 고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0〉 청나라 황실은 몽고를 소중히 여겼다. 몽고사무국(蒙務局)을 두고 정국이 꼬일 때마다 몽무국 책임자(督辦)를 파견했다. 1908년 봄 몽고로 가는 도중 선양 교외에서 모습을 남긴 몽무국 독판 주치첸(朱啓鈐·주계검. 왼쪽 다섯째) 일행. 주치첸은 중화민국 국무총리도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청 태조 누르하치는 몽고 여인을 황후와 황비로 맞아들였다.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였다. 태종 황타이지(皇太極)는 더 심했다. 일후사비(一后四妃), 황후와 4명의 황비가 모두 몽고 여인이었다. 그것도 칭기즈칸의 후예인 황금가족 집안 자매들이었다. 명나라 숭정(崇禎) 8년, 후금(後金) 천총(天聰) 9년, 도르곤(多爾袞)이 지휘하는 원정군이 몽고의 차하르(察哈爾)에서 생각지도 ..

자오얼쉰 ‘이마제마’ 포석…장쭤린에게 만주군 통솔권 일임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9〉 장쭤린(왼쪽)은 일본의 동북진출에 협력과 반목을 병행했다. 오른쪽은 일본 공사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 1928년 5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만주에서 마적(馬賊)은 묘한 직업이었다. 부업인 사람도 있었지만 본업이 더 많았다. 농가나 상가에 자금유통이 빈번한 가을에서 이듬해 2월까지가 대목이었다. 봄바람이 불면 두목은 부하들에게 수입을 분배하고 초가을까지 휴식에 들어갔다. 쉬는 기간 마적들은 부업을 찾았다. 노동이나 음식점 종업원, 지주 집안 잡무 처리, 사창가 심부름꾼 등 하는 일도 각양각색이었다. 교사나 경찰도 있었다. 장쭤린의 투항 처음엔 반신반의 마적들 귀순시키자 의심 풀어 독립 선포한 혁명군 진압 임무 2000명 소탕, 새 권력 출현 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