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92

룽윈 배출한 윈난강무당, 청산리 영웅 이범석도 다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8〉 아들과 함께한 리페이롄(왼쪽)과 룽윈의 여동생. [사진 김명호] 옛날부터 윈난(雲南)인들은 무(武)를 숭상했다. 글(文)은 잘해도 알아주지 않았다. 룽윈(龍雲·용운)도 일찌감치 무예의 길로 들어섰다. 1990년 10월, 장남 룽셩우(龍繩武·용승무)가 타이베이에서 구술을 남겼다. “부친은 어릴 때부터 독서를 싫어했다. 기마와 궁술, 무예에만 열중했다. 윈난은 궁핍한 변방이었다. 아편 재배 외에는 돈 될 것이 없었다. 절약을 위해 옷도 거의 입지 않았다. 잘 때도 옷이 해질까 봐 애 어른 할 것 없이 벌거벗고 잤다. 도둑이 들면 온 마을 사람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뛰쳐나와 볼 만했다. 나도 말로만 들었지 본 적은 없다.” 한국 청년들, 군사학 교육 받..

“룽윈은 평생 민주를 옹호, 독재에 굽히지 않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7〉 중일전쟁 기간 윈난은 중국의 후방기지였다. 중국 전구(戰區) 사령관 장제스 영접하기 위해 쿤밍 공항에 나타난 룽윈. [사진 김명호] 1962년 6월 29일, 신화통신이 한 노인의 죽음을 타전했다.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상무위원,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중앙상무위원 룽윈(龍雲·용운)이, 1962년 6월 27일 오전 7시 30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통일선전부 부부장이 룽윈의 부인 구잉치우(顧映秋·고영추)를 방문했다. 발표가 3일간 지체된 이유를 설명했다. “룽윈을 우파분자로 규정한 것은 착오였다. 이틀간 토론을 거쳐 이름 앞에 우파분자 4자를 삭제하자고 중앙에 건의했다. 각 당파도 이견이 없었다.” 룽, 체구 작았지만 검술·봉술 탁월 사관학교에서 ..

젠보짠 “펑위샹 억울한 죽음에 침묵하는 세태 한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6〉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교수들과 젠보짠(앞줄 왼쪽 넷째). [사진 김명호] 국·공내전 시절, 홍색선전기관 신화사(新華社)는 4월만 되면 분주했다. 5월 1일 국제노동절에 발표할 선언문과 구호, 집회, 시위 준비 등 할 일이 많았다. 승리를 앞둔, 1948년 노동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신화사 사장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는 부원들과 태항산 깊숙한 곳에 주둔 중이었다. 관례대로 중공 중앙 소재지 시바이포(西柏坡)에 전문을 보냈다. “노동절이 임박했다. 승리가 임박한 중요시점이다. 발표할 내용 중 중요사항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마오쩌둥과 중앙서기처 서기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등 지휘부는 랴오의 요청에 신경을 썼다. “국민당 정권의 붕괴와 신중국 탄..

대역사가 젠보짠 “펑위샹 장군은 중국 진보의 상징”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5〉 1968년 문혁 발발 2년 후, 비판대에 끌려 나온 젠보짠. [사진 김명호]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은 사후에 총명한 며느리를 봤다. 1978년 가을, 해양지질연구소는 자료실 요원 위화신(余華心·여화심)을 선진공작자로 선정했다. 후보였던 부시장 딸이 씩씩거렸다. “대관료이며 대군벌이었던 펑위샹의 며느리는 자격이 없다.” 위화신은 분을 참기 힘들었다. 조직에 건의했다. “나는 펑위샹의 며느리고 위신칭(余心淸·여심청)의 딸이다. 문혁 시절,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진(自盡)한 생부는 1년 전에 명예를 회복했다. 역사 앞에 당당했던 펑 장군의 가족이 이런 대접 받는 것이 분하다. 장군의 전기 집필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조직은 선정했다 탈락시킨 위에게 미안했다. 청..

펑위샹 심복 위신칭 “공산비적과 내통한 원조는 쑨원”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4〉 육군검열사 시절의 펑위샹(가운데). [사진 김명호] 1966년 문혁 초기, 신중국 국가의전의 창시자 위신칭(余心淸·여심청)은 홍위병들의 닦달에 치욕을 느꼈다. 집에서 목을 맸다. 4년 전부터 심사와 심문에 시달리던 시중쉰(習仲勛·습중훈)은 옛 동료의 자살 소식에 가슴을 쳤다. 훗날 측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위신칭은 우리와 길을 함께한 고급지식인이었다. 무슨 일이건 방향이 분명했다. 강직하고, 아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모욕 대신 죽음을 선택했다. 정통파 지식인답게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애석할 뿐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위, 펑과 장제스 반대운동에 앞장 국민당 특무기관, 통비 혐의 체포 미 유학시절에 만난 부인 류..

뉴욕으로 떠난 펑위샹 “장제스는 제2의 히틀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3〉 1935년 12월 2일, 항일을 결심한 장제스(앞줄 오른쪽 넷째와 다섯째 중간)와 펑위샹(앞줄 오른쪽 여섯째 뒤쪽)이 국민당 중앙집행위원들과 쑨원 능을 참배했다. 앞줄 오른쪽 여덟째가 중앙집행 위원장 위유런(于右任). [사진 김명호]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에서 중·일 양국이 무력 충돌했다. 국·공 양당은 합작을 선언하고 대일 항전에 돌입했다. 2년 전 태산(泰山)에서 하산, 수도 난징(南京)에 와있던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항전 결정에 갈채를 보냈다. 장도 펑을 우대했다. 제3전구(戰區)사령관과 6전구사령관에 임명했다. 펑, 공산당원·국민당 좌파와 교류 장, 6전구 없애 펑의 군 지휘권 박탈 저우언라이, 비밀리에 펑과..

타임 “펑위샹은 세계서 사병 가장 많은 기독장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2〉 민중항일동맹군을 조직하기 위해 하산한 펑위샹. 1931년 11월, 장자커우. [사진 김명호] 타임지 설립자 헨리 루스의 평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의화단(義和團)사건부터 1925년 쑨원(孫文·손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국은 서방 선교사들의 천국이었다. 학교 설립도 제약을 받지 않았다. 1920년대 중반, 서방 선교사들이 세운 27개 대학에 3700명의 중국 학생이 있었다. 그간 배출한 졸업생이 4만 3000명을 웃돌았다. 중학교와 초등학교까지 합하면 중국 청소년 35만여 명이 교회학교를 다녔다.” “오합지졸 중국의 기독교 전사들 당당한 군인으로 변모시킨 인물” ‘타임’ 1928년 7월 2일자 표지 장식 펑, 미국인 목사 부부 선행에 감동 부하들에게 기..

펑위샹 “애들은 애완견 아니다, 능력 갖추게 엄히 키워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1〉 펑위샹과 리더촨은 1남 3녀를 뒀다. 뒷줄이 장녀 펑리다. 1940년, 충칭. [사진 김명호] 한동안 펑위샹(馮玉祥·풍옥상)에 대한 평가는 야박했다. 은원(恩怨)이 남달랐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찬양과 비난을 반복했다. “배신이 직업”이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았다.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1959년 여름 뤼산(廬山)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에게 비판받자 “펑위샹 같은 인물”이라며 맞받아쳤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달랐다. 펑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일생을 “애국자” 한마디로 요약했다. 남들은 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군기밀비 쓴 장남에게 주먹 날려 병기창에 보내 8주간 중노동시켜 호랑이 아버지 덕에 자녀들 성공 장제스·..

정변 성공한 펑위샹 “황제놀음 푸이, 20분 내에 내쫓아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0〉 덩샤오핑은 펑위샹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펑이 북벌을 결의한 우위안에 거대한 기념광장을 조성했다. [사진 김명호] 1924년 10월,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이 일으킨 베이징정변(北京政變)은 중국이 가장 복잡할 때 일어난 복잡한 사건이었다. 미국의 펑위샹 연구자 셰리든은 정변의 배후로 일본을 지목했다. “정변 하루 전인 10월 21일 밤, 일본군 장교가 구베이커우(古北口)의 펑위샹사령부에 나타났다. 장시간 밀담을 나눴다. 이 일본군 장교는 정변 후 펑의 개인고문을 지냈다. 일본의 중국 침략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과 동북의 이권 놓고 충돌 일본이 펑 베이징정변 사주설 일 혐오주의자 우페이푸 제거 장쭤린에 굴복하고 하야한 펑 국민당 입당한 다음날 소련..

베이징 중앙정권 장악한 펑위샹 “정변 아닌 혁명”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9〉 1912년 1월 1일 밤에 열린 쑨원의 임시 대총통 취임식은 야간 촬영시설 미비로 영상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서화에 능한 동맹회 회원 위안시뤄(袁希洛)가 당시 기억을 더듬어 참석자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사진 김명호] 중국 근대사에 베이징정변(北京政變)이 세 번 등장한다. 1861년 10월, 26세의 서태후 즈시(慈禧·자희)가 시동생과 손잡았다. 권신 수쉰(肅順·숙순)을 제거하고 탈권(奪權)에 성공했다. 37년 후, 즈시가 또 일을 벌였다. 황제 주변에 얼쩡거리는 개혁파들에게 철퇴를 가하고 황제의 권력을 솜방망이로 만들어버렸다. 즈시 태후가 일으킨 두 차례 정변은 궁중의 권력 암투였다. 형장 주변에 몰려온 구경꾼과 망나니들의 칼춤만 요란했다. 청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