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나절 부슬부슬 비 내리는 강마을. 밤 되자 찾아온 도적들이 날 알아보네. 앞으로는 이름 숨기고 살 필요 없겠군. 지금 세상 절반이 그대들과 같겠거늘. (暮雨瀟瀟江上村, 綠林豪客夜知聞. 他時不用逃名姓, 世上如今半是君.) ―‘정란사에서 묵다 밤손님을 만나다(정란사숙우야객·井欄砂宿遇夜客)’ 이섭(李涉·800년대 초엽 활동) 강마을에서 하룻밤 묵게 된 시인의 배 안으로 도적 떼가 들이닥쳤다. 시인의 신분을 확인한 도적 수괴의 반응이 놀라웠다. ‘태학박사를 지낸 이섭(李涉)이 분명하다면 내 익히 그 시명(詩名)을 듣고 있으니 재물 대신 시 한 수면 족하다’는 거였다. 이 황당한 요구에 시인이 즉흥적으로 응해준 게 바로 이 시다. 도적조차 자기를 알아볼 정도라니 굳이 이름을 숨기고 은둔 생활할 필요가 없겠다 싶..